(2)-정부군 투항, 함께 잡혀-본사 독점수지본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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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서울에 띄운 나의 편지는 많지 않았었다. 가족들에게 자주 소식을 보내지 않은 것이 죄스러웠다. 자주 못쓸 뿐 아니라 내 편지는 늘 짧았다.
『나는 잘 있소. 애들 잘 기르오』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내가 마의 7번 공로에 종군취재를 나서기 직전에 보낸 편지는 가장 긴 것이었다. 자그마치 원고지 석 장을 메웠다. 서울의 가족들은 아마 불길한 직감을 느꼈을 거다. 마지막 편지이자 가장 장문의 글발이었으니. 말하자면 유서가 될 뻔했던 그 편지엔 『내가 옛날에 신세진 사람들을 연말에 빠짐없이 찾아보고 설탕봉지라도 돌리시오』라고 썼다. 이 아니 완전무결한 유서인가.

<월남종군으로 신문상>
내 신상에 풍운이 비낄 때마다 그 같은 징크스가 나를 따랐다. 작년초봄, 내가 두번째 월남전선에 뛰어들었을 때도 그랬다. 나보다 한발먼저 청룡부대소속으로 와 있던 동생 수철(25·당시 3대대소속사병)이 위태롭게 느껴졌다. 아무리 그가 용맹스런 해병이라지만 담력은 나만하겠는가. 나는 6·25때 학도병 소위로 이용부대(현 철도청장)를 따라 평양까지 진격했던 터라 전진이 몸에 밴 몸. 나는 맹호부대를 떠나 「투이호아」(당시 해병작전지역)로 날았다. 적에 휩싸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나 그곳서 나는 「히트」사진을 찍었다. 그때 나는 부대장으로부터 『군법회의에 불리겠다』는 호통을 들었으나 귀국하자 국방장관으로부터 화랑훈장을 받고 사진보도로 제1회 한국신문 상을 탔다.
지난달 17일은 내 생일이었다. 전쟁터에서 맞은 생일이라 한결 마음이 스산해 조촐한 「파티」로 기분을 달래기로 했다. 좋아하는 깍두기도 담그고-. 몇몇 친구들을 초대했는데 그 중엔 플리처 상을 받은 UPI의 일본인기자 「사와다·교이찌」씨도 끼여있었다. 그러나 「사와다」씨는 나의 깍두기도 들지 못한 채 자신의 부음을 나의 생일「파티」에 전해왔다. 바로 그날 다른 기자 화 함께 피살된 것이다.

<위기 느낀 동료들 잠적>
운명의 날인 11월22일 상오10시.
여느 때와 같이 몇 시간 뒤엔 생과 사가 엇갈릴지도 모르는 채 종군기자일행은 내가 운전하는 「피아트」 「스포츠·카」로 7번 공로를 달렸다. 중국어신문기자 「헨」과 「뉴요크·포스트」의 「메니언」기자 등 4명이었다. 「스포츠·카」는 하오1시40분에 「스쿤」에 있는 정부군공정부대에 닿았다.
이 부대는 「스쿤」으로부터 「콤퐁참」에 이르는 길을 뚫기 위한 작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나는 군인들과 함께 18㎞ 떨어진 여단본부를 거쳐 전초에 이르렀다. 하오2시30분에 「베트콩」의 박격포·B-40「로키트」포가 터지는 등 전세가 거칠어졌다. 정부군은 후퇴할 낌새라 이를 눈치채고 다른 기자들은 어느새 사라졌다. 나는 외톨이가 되어 정부군에 바삭 붙어 행동하는 수밖에 없게 됐다. 하지만 내가 믿고 따르던 대대마저 본부가 적탄에 박살나 지리멸렬-. 하오 3시30분께는 대대장이 쓰러졌다. 정부군은 하나 둘 손을 번쩍 들고 투항하기 시작했다. 논두렁에 엎드렸던 나도 망설이던 끝에 손을 들고나섰다. 「웨스티·스타일」에 카메라를 주렁주렁 멘 내 가슴에 총검을 들이댔다. 하지만 적은 27명뿐이었다. 대부대를 가장 했음이 드러났다.

<"한국인이다"에 아 찔>
내 손에 노끈이 칭칭 감겼다. 결박당한 채 한쪽으로 나와 『나는 기자다』고 월남어로 신분을 밝히자, 나를 따로 떼어놓았다. 대열에서 떼어놨지만 감시병이 따로 붙어 나를 끌고 행진이 시작됐다. 이때 포로인 정부군 1명이 『저자는 한국인이다』고 소리쳤다. 순간 아찔했다. 다행히 적들도 지쳐 있어 이 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고 계속 몰고 갔다. 내 주위에 6명의 감시병이 에워쌌음을 알자 절망은 더했다. 해가 기울고 어둠이 깔렸을 때 나는 손에 묶인 노끈에 힘을 주어봤다. 결박이 느슨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시치미를 떼고 고분고분 하라는 대로했다. 새벽 4시께야 한 마을에 도착, 아침 식사를 주었다. 「메뉴」는 소금 뿌린 주먹밥 한 덩어리에 볶은 개구리 다리 서너개.
기갈에 지쳐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담배 한대 달랬더니 한 개비를 물려주고 불까지 당겨준다. 심문 받기 전에 신분증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얼핏 났다. 느슨한 손을 써서 양말 새에 넣어둔 신분증을 꺼내 찢어버렸다. 주월 미군 사·한국군사에서 각각 발행한 신분증을 없애고 국적 난이 없는 「비스뉴스」것만 지녔다. 생명같이 여기는 카메라와 필름 라이터 시계 「캄보디아」돈 7백「리엘」 그리고 「카·세트」녹음기를 뺏겨 몸은 홀가분했다. 그러나 군화마저 벗겨가고 호지명 샌들을 신겨 주는 바람에 발이 부르트기 시작했다. <계속> 【이요섭<영 비스뉴스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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