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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제자는 필자>|무성 영화 시대 (11)|신일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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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임자 없는 나룻배>
이귀영 감독의 『승방비곡』과 『수일과 순애』 등이 나온 것은 아리랑 2편 직후였다. 그후 내가 다시 데뷔할 34년까지의 영화계는 문자 그대로 전멸 상태였다.
1년에 2편씩 밖에 만들어지지 않아 양적으로도 형편없었다. 그러나 32년에 발표된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는 작품과 흥행 면에서도 같이 성공을 거두었다. 각본·감독은 이규환씨였고 주연은 나운규·문예봉·김연실·임운학씨 등이었다.
대구 출신인 이규환씨는 상해·일본 등지에서 영화 연출 공부를 하고 돌아와 이 『임자 없는 나룻배』를 처음 감독하게 됐던 것이다. 당시 27세의 신인이던 그는 영화계의 대 선배인 나운규씨를 꼭 주연으로 쓰고 싶었다.
깍듯이 인사를 차리고 나 선생에게 시나리오를 주고서도 어떤지 불안해했던 그는 다음날 다시 나 선생을 만났을 때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 선생이 이미 역중 인물로 분장하기 위해 머리까지 빡빡 깎고 나왔던 것이다.
기쁨에 넘친 이규환씨가 『고맙기는 합니다만 머리를 너무 빡빡 깎았습니다』라고 하자 춘사는 『이렇게 깎아야 촬영할 때쯤 해서 적당히 자란다』고 대답했다는 것이었다.
『임자 없는 나룻배』는 문명화라는 이름 밑에 밀려 나는 한 착하고 가난한 농부의 생활을 그렸다. 농부 수삼 (나운규분)은 가뭄과 수해에 밀려 서울로 와서는 인력거꾼이 된다. 어느날 만삭이 된 아내 (김연실분)의 출산비를 마련키 위해 도둑질을 하다 철창 신세를 지게되고 그의 아내는 길거리에서 아기를 낳는다.
그러나 수삼이 출옥했을 때는 아내는 이미 다른데로 시집을 간 후였고 화가 치민 그는 딸 하나만 데리고 고향으로 되돌아 온다.
10여년이 흘러 이 마을에는 일제가 철교를 놓게 되자 나룻배 사공이 된 수삼은 살 길이 막힌다. 게다가 철교를 놓는 일인 기사 (임운학분)가 그의 딸 (문예봉분)에게 추근거리게 되자 수삼은 도끼를 들고 그 철도 기사를 내리치고 또 철교도 찍어버린다. 그 동안 집에서는 불이 나 딸이 그 속에서 타 죽고, 강가에는 『임자 없는 나룻배』만이 떠 있다.
이 작품은 탄사의 아리랑에 이은 또 하나의 명작이었고 일본에서도 절찬을 받았었다. 이동안 나의 결혼 생활 7년은 비극으로 끝장을 맺고 말았다.
본처가 나타난 후 남편은 태도를 바꾸어 나를 때리기까지 했고 나중에는 하인들을 시켜 문밖 출입도 못하게 감시했으니 나는 오빠를 원망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본처는 아주 마음씨가 착한 여자여서 나를 많이 동정해 주었고 또 현모양처답게 남편 시키는대로 친정에 가 있기가 일쑤였다. 그러니 나는 오히려 본처에 대해 미안하기도 하고 마음의 부담을 느끼기도 했다.
그 무렵 남편은 투기 사업인 미두에 손을 대 쌀값 시세를 올렸다 내렸다 하기도 했지만, 얼마 못 가 악질 브로커들의 농간에 떨어져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몽땅 날리고 말았다.
이미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집도 없어 시동생에게 얹혀 살아야 했고 남편은 더 타락해서 학대만 심해 갔다.
결혼 7년째 되던 1934년 어느날 견디다 못한 나는 우물가에 있던 양잿물을 마시고 죽으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동네 아낙네들이 빨리 달려와 간신히 살아 났고 서울에서 친정어머니가 달려 내려왔다.
이렇게되자 남편이 없는 틈을 타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상경해 버렸다. 이것이 결혼 생활의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남편은 나에게서 두 아들을 빼앗아가고 말았다.
이때는 아버지와 오빠도 작고한 뒤였고 남편에게서 버림받은 나는 자식마저 앗기고 보니 허전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내가 시집에서 소박맞고 돌아왔다는 소문이 나자 한동안 잠잠했던 나의 사생활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신문에서 나에게는 동정적이었고 컴백을 예측하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몸과 마음의 상처가 좀 가실 무렵 일본 대판에 본사를 둔 「OK·레코드」 서울 지사장 이철씨가 찾아와 레코드 취입을 제의했다. 나는 곧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때는 고복수 이난영씨 등이 이미 데뷔해서 『타향살이』『목포의 눈물』 등이 한창 유행했었다. 나는 곧 이들과 같이 레코드 취입 차 도일하게 되었다.
종로 경찰서에서 도항증을 받고 열차 편으로 부산에 내려가 연락선을 탔다. 당시 대판에는 주로 가난한 우리 교포들이 많이 살았었다. 우리는 이들을 위해서 위문 공연을 가졌는데 극장을 꽉 메운 교포들은 가수들의 노래가 끝날 때마다 소리 내어 엉엉 울기까지 했었다.
처음 가극단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일본에서 나는 『무너진 아리랑』 등 10여 곡을 취입하고 가수로서 새로운 이미지를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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