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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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1월도 지나고 마지막 달을 맞는다. 「캘린더」에 얄팍하게 남은 서른 한 장을 이제 넘기면 이제 한해도 간다. 사라져 가는 모든 것에 정을 담는 것이 인정, 그러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한 해의 마지막장에서 느끼는 정념처럼 애틋하고 서글픈 것은 없다
11월을 두고 영국인은 목매어 죽는 달이라 했다 그처럼 우울한 감정까지도 얼어 붙이는 혹한이 이제 엄습해올 것이다. 오늘 새벽의 수은주는 벌써 영하 11도로 내려갔다. 이제는 따스함도, 햇빛도 나비도 과실도 꽃도 새도 그리고 낙엽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지상의 모든 것이 동면 속에 기어드는 철이다.
차라리 12월의 추위가 모든 것을 얼어 붙일 수만 있다면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캘린더」의 마지막 한 장 한 장을 찢어 버릴 때마다 늘어만 가는 아쉬움을 주체할 길이 없는 것이다. 거리는 이제 송년의 채비로 더욱 어수선해질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매듭을 강압할 것이다. 마치 엄청난 채무의 독촉처럼 들이닥치는 서슬이 파란 시계바늘의 움직임이 사람들의 가슴을 죄어 매는 섣달. 매듭을 위하여 「캘린더」는 있다 그러나 매듭을 지울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묶어 놓을 수 없는 것이 숙명인줄 알면서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것은 그저 사람의 어리석음 때문에서일까. 소리없이 사라져 가는 한해의 막바지에 서서히 모두가 마음속에 품었던 꿈의 달콤함을, 그리고 깨어진 꿈의 서글픔을 다시 한번 조용히 가늠해 본다는 것은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무겁게 사람들의 마음을 죄어 매는 밤들은 너무나도 긴 것이다. 그리고 섣달의 추위는 한 가닥의 낭만도 감상까지도 얼려놓고 있는 것이다.
올해에도 사람들은 어김없이 4천만개의 꿈을 꾸었다 그 중에 서 몇 개나 결실을 보았는지 이루어진 꿈보다는 이루지 못한 것이 더 많은 지도 모른다. 그런대로 사람들은 한 해를 또 넘겨야만 한다. 이 해가 빨리 지나가고 새해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묵은 해를 아쉬워하는 사람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저 누구나 조용히 번뇌해탈, 죄업삭감만을 바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12월은 이를 위하여서만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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