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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영화시대(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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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아리랑』한편으로 일약「스타」가 된 나는 이어 이경손감독의『봉황의 면류관』에 출연했다. 이 영화에서는 신인 정기석씨와 공연했다.
그 당시 정기석씨는 부호의 아들로「스타」를 꿈꾸는 미남 청년이었는데『장한소』에서 순애역의 미녀 전정숙씨와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래서 이경손감독과 손을 잡고 자신이 돈을대어 만든 것이 이『봉황의 면류관』과 후의『춘희』였다.
『아리랑』을 내놓은 후 춘사는 같은해『풍운아』를 만들었다. 이『풍운아』는 나라 잃은 그 당시 젊은이들이 큰 뜻을 품고 방랑하는 그런 얘기였다.
춘사의 작품들은 모두 이같이 민족성을 띤 것이었다. 그중에서도『아리랑』이 대표적이지만『풍운아』『잘 있거라』『두만강을 건너서』등이 모두 그런 것이었다. 만주의 독립얘기를 그린『두만강을 건너서』는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걸려『사랑을 찾아서』라고 제목을 바꾸어야만 했다.
조선총독부는『아리랑』이 만들어진 이후부터 차차 우리 영화에 감시의 눈길을 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리랑』때는 당시 단성사의 선전부장이던 이노영씨가 총독부 경무국으로 붙들려 가 혼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는 영화대본만 검열을 받으면 되었었는데 그 이후로는 대본과 화면설명을 같이해야 검열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춘사가『아리랑』을 만들때는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 그는 1902년 함북 회령에서 태어났다. 윤봉춘씨와는 같은 나이, 같은 고향의 죽마고우로 같이 간도의 명동중학에 다녔다. 거기에서 그는 도판부사건의 주동인물로 주목받자 윤봉춘씨와 같이 만주로 도망가서 유랑하기 시작했다.
그 후 그는 서울에 와서 연전 문과에 다녔는데 일경에 붙잡혀 1년반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22세때 출감한 그는 그때 회령으로 지방 순회중이던「예림회」의 안종화씨와 알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후일 배우로「스타트」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해 가을 그는 안종화씨가 있던 부산의 조선「키네마」주식회사로 찾아갔다. 처음 연기「테스트」에서는 불합격을 받았으나 안종화씨가 우겨 입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경손 주삼손 주인규 김태진씨(후일의 남궁운) 등과 함께 윤일남씨의 집에 묵으며 연구생이 된 것이다.
『아리랑』을 만들기 전까지 춘사가 출연한 영화는『운영전』에서의 단역과『심청전』 『절중오』정도 뿐이었다.
그러니까『아리랑』은 춘사에게 첫「시나리오」이며 첫 감독작품이었다. 춘사는 이『아리랑』을 그가 영화계에 들어온 직후부터 구상했던 것 같았다.
고향에 들러 친구인 윤봉춘씨와 만났을 때드 그는 석경(석경)을 꺼내놓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는『어때! 미친것 같아?』하면서 영진역의 미친 흉내를 열심히 내곤 했었다는 것이다.
춘사는『아리랑』에서 주인공을 미치광이로 설정해서 검열을 통과할 수 있게 했고 또 그미치광이 영진이가 순사의 뺨을 때리는 통쾌한「신」을 넣기 위해서 괜히 다른 사람도 때리는「컷」을 넣어 꾀를 쓰기도 했다. 이『아리랑』이 상영될 즈음 각 극장 변사의 인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영화 한편을 죽이고 살리는 권한이 전혀 변사에게 달려있었다.
관객을 울리고 웃기고, 희극을 비극으로 만드는 재주가 변사에게는 있었다.
『아리랑』 은 각 극장마다 만원을 이뤘고 변사도 절로 신바람이 나서 해설을 맡았다.
특히「라스트」에 영진이가 수갑이 채워져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면서『가는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내가 미쳤을 때 잘 부르던 노래「아리랑」을 불러달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감정을 돋우다못해 흐느끼기까지 했다.
이통에 변사들이 수난을 당하기도 많이했다. 한참 신이나서 해설을 하다가 임검 순사에게 붙들려가서 혼이 나면 그사이에 다른 변사가「바통」을 이어 해설을 하기도 했다.
그 당시 단성사에는 서상호·서상필씨 형제 변사가 있었는데 한창 인기절정이었다. 극장이 파할 때면 으례 문 앞에는 장안 명기들이 보낸 인력거가 줄을 이었다.
형인 서상호씨는 23세에 고등연설관 변사로 들어갔는데 그는 굵직한 목청과 익살이 그럴듯한데다 대본을 한번 보면 단번에 화면과 해설의「템포」를 맞추는 천재적인 소질을 가졌었다.
우미관을 거쳐 단성사에서 일할 즈음에는 인기도 굉장했고 돈도 많이 벌어 차차 방탕의 길로 접어들었다. 매일같이 기생들과 애욕생활에만 빠져 나중에는 마약까지 가까이했고 그후「로키」가 들어올 즈음에는 직업도 잃고 거지꼴이 되어 인기인의 비참한 최후를 장식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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