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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진단-근로 전선 이상 없나 (상)|영하 지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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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상적인 근로 조건은 근로자의 작업 의욕과 능률을 높여준다. 좋은 환경과 높은 임금은 근로자 개인의 복지에 속한 사항일 뿐더러 기업주와 전 사회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근로자들은 일부 몰지각한 기업주나 방심한 당국에 의해 건강과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는 반면 어떤 근로자들은 보장된 근로 조건 아래서 권익을 누리고 있다. 전국의 근로 사업장의 실태와 개선 방향을 살펴본다.
노동청은 전국의 근로자 수를 16명 이상 고용 업체 9천6백18개소에 1백5만5백66명으로, 10∼15명을 고용하고 있는 3천57개소에 3만8천6백21명으로 각각 집계하고 있다. 이밖에 10명 이하의 고용 업체와 근로자에 대한 실태는 전혀 파악되어 있지 않다.
노동청이 올해 상반기 동안 이중 50명 이상의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는 6백18개 업체에 대한 근로 조건 실태를 조사한 결과 98%인 6백8개소가 근로 기준을 어기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 근로 기준법의 적용 대상이 돼 온 16명 이상 고용 업체 중, 특히 50명 이상을 고용한 대기업체의 기준 위반 업소가 대부분임은 근로 기준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던 소규모 업체 근로자의 작업 환경이 더욱 엉망일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풀이되고 있다.
최근 대한 산업 안전 보건 협회 (회장 최영태)가 D화학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S식품 (영등포구 신대방동) F물산 (영등포구 양평동) D정밀 (성동구 화양동) 등 큰 업체에 대해 근로 환경 실태 조사를 한 일이 있었다. 이 협회의 조사 결과는 「벤젠」이나 「트리클로르·에틸렌」 등 접촉제·용해제 및 경금속 세척제로 널리 쓰이고 있는 화공 약품이 근로자들에게 적혈구와 백혈구의 감소 및 재생 불능성 빈혈과 「알레르기」성 피부염 등 불치의 직업병을 유발시키고 있음을 밝혀 냈지만, 노동청이나 사업주 등이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협회는 이중 작업 환경이 우수한 것으로 알려진 사업장에서 세척실 직원 7명과 제조공 15명 등에 대해 「벤젠」 등의 중독 여부를 조사했더니 단 l명을 제외한 나머지 21명이 모두 중독 현상을 나타냈다고 밝혔다.
이밖에도 H「슬레이트」 (한강로 2가), K초자 (서대문구 홍은동) K주물 (용산구 문배동) H제분 (동대문구 답십리동) D물산 (동대문구 휘경동) 등의 대기업체도 근로자들이 자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장비나 시설을 갖추지 않아 노동청으로부터 개선 지시를 받고 있는 실정. 그러나 작업 환경은 이 같이 근로 기준법의 적용 대상이 되는 큰 업체보다 법에서 소외된 영세 사업장의 경우 더욱 시급하다.
서울 동대문구 이목동 K산업 사에서 지난 20일 밤 10시20분 「콜타트」를 끓이던 가마솥에서 불이나 밤일을 하던 직공 윤승규씨 (26)가 불타 죽었고 신용철군 (20) 등 11명이 중화상을 입었다.
자동차 부속품을 생산, 대자동차「메이커」에 납품해온 K산업 사는 「솔벤트」 PVC 등 각종 인화성 유독 물질을 사용하고 「콜타르」를 끓이는 등 위험한 일을 하고 있으나 작업복·장갑·고무장화 등 종업원의 안전을 위한 기구는 전혀 갖추지 않고 항상 생명의 위협 속에 밤낮 없이 일해 왔다는 것. 화상을 입은 박광렬군 (19)은 월급 5천1백70원에 40여명의 직공이 한방에서 합숙하면서 2일에 한번씩 밤일을 하다가 변을 당했다고 말했다.
고정자 양 (21)은 충북 청주시 D가발 공장 직공. 고양은 여 직공 대표로 지난 22일 5개월 동안 밀린 월급을 받으러 서울에 와 사장 홍모씨 (42) 집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고양은 가발 작업이 『사람의 피를 말리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실오라기보다 가는 머리카락 하나 하나를 침침한 불빛 아래서 바늘로 꿰매고 나면 눈 신경의 피로는 말이 아니고 모두들 눈을 버리면서 일하는 상태인데 사장은 고작 한달에 5천원의 급류마저 잘 주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신순희 양 (18)은 월급 8천원을 받는 A운수 여 차장.
서울 마포구 창전동 「스프링」 공장인 S철공소의 박진석군 (15)은 철공소 견습 3개월생. 숙직실에서 잠을 자며 새벽 6시에 일어나 기계에 기름을 치고 걸레질을 하고 바닥을 쓸어낸다.
밤 9시에 일을 끝내고 뒤치다꺼리도 박군이 도맡고 있다.
「스프링」을 펄펄 끓는 기름 통 속에 담갔다가 꺼내 갑자기 식혀 탄력과 강도를 주게 한다.
직공 4명은 장갑도 끼지 않고 일하고 있었으며 기름이 튀어 화상을 입는 일은 예사라고 했다. 쇠붙이를 끓는 기름통에 넣을 때 나오는 각종 유독성 개스를 그냥 들여 마시고 있으나 주인은 직공들에게 장갑이나 마스크도 주지 않고 일만 호되게 재촉할 뿐 이들의 건강 문제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박군이 털어놓았다.
노동청 집계에 따르면 69년도에 56만6천여명의 근로자에 대한 건강 진단 결과 약 10%인 5만4천8백74명이 질병자이며 그중 1천1백44명 (전체 근로자의 0·2%)이 직업병 환자였다.
재해 발생 건수도 5백39건에 5백69명이 사망, 12명이 부상했다.
이 직업병이나 산업 재해는 거의가 작업장 환경의 불비 때문으로 예방이 가능했던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어 근로자들의 피해는 예방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낮은 임금에 쪼들리는 근로자들은 작업 환경의 개선은 아예 주장도 못하고 있는 형편. 노동청이 집계한 지난 11월말 현재 쟁의 건수 33건 중 26건이 대부분인 임금 인상 투쟁이고 권리 분쟁이 4건, 감원 반대가 1건, 기타가 2건으로 환경 개선 쟁의는 1건도 없었다.
근로자들은 내 몸 같이 아끼고 있는 사업주들도 적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리사욕에만 급급한 나머지 근로자들의 건강과 생활을 도외시하는 사업주들이 많은 사업 풍토가 문제라 하겠다. 여공들을 교도하기 위해 6개월 동안 자기 신분을 숨기고 A방직 공장 직공으로 취직했던 조화순 목사 (34·인천 도시 산업 선교 위원회)의 말은 아픈 교훈을 남기고 있다.
『6개월 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느낀 것은 근로자들의 영양 부족과 과로에 지친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의 절실한 요망은 빵과 휴식이라고 느꼈을 때 나는 용기를 잃었지요. 그들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임금 인상과 근로 조건 개선이 시급한 문제였읍니다.』

<김재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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