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학생의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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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복녘의 겨울은 일찍 찾아든다. 1945년11윌23일, 거듭되는 영하의 추위로 얼어붙은 신의주의 온 거리가 선혈로 물들었다.
하오 2시의 길이었다. 거리는 다시 낭자한 핏자국을 그대로 남긴 채 얼어붙고, 차츰 기울어져 가는 태양과 함께 온 북녘 땅은 어둠 속에 기어들게 되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따사한 햇빛을 보지 못한 채 25년이 흘렀다.
신의주학생들의 의거는 보기에 따라서는 해방직후의 격동기, 광란에 찬 역사의 숨막히는 소용돌이 속에서 더 어쩌면 물거품처럼 하찮은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해마다 이날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지만 차츰 망각 속에 잊혀져만 가는 것은 이 날의 정신이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와 함께 날로 자라나야 할 것인데 말이다.
이날 한 주먹의 학생들이 맞선 것은 소련의 기관총과 따발총이었다. 처음부터 무슨 승산이 있던 것도 아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그저 자유를 억누르는 공산주의의 폭력과 부정에 대하여 젊은이들의 피가, 그리고 조국을 더럽히는 온갖 악에 대 분노가 이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던 것이다.
역사를 더럽히는 이는 많다. 침략의 피, 살륙의 피, 약탈의 피. 그러나 역사를 곱게 수놓아주는 피도 많다.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는다는 것은 이런 고운 피로 수놓은 에피소드들이 수없이 쌓여져 하나의 챕터를 기록했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25년 전의 이 무렵, 민주주의의적, 공산도배들은 전국에서 극성을 피웠다. 이에 맞서기 위한 유혈도 많았다. 그러나 이미 소련이 진주하고있던 북한에서의 반공은 처음부터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또 그만큼 처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신의주의 어린 학생들을 누가 감히 무모했다고 탓할 수 있겠는가?
이날의 의거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이제는 거의 없다. 살아남은 학생들도 이제는 모두 장년이 되어있다. 아깝게 희생된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이제는 없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에게 다시없이 소중한 거울을 남겨놓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 25년 전의 이날을 혹 잊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무엇이 이날의 학생들을 맨주먹으로 일어나게 만들었는지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떠한 추위도 얼어붙게 만들지 못할 만큼 뜨거운 피의 젊은 약동을, 그리고 자유를 그리는 젊은이의 맥박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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