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골」불 대통령의 서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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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프랑스」전 대통령「샤롤·드골」장군이 9일 그의 향리인「콜롱베·레·되제글리즈」에서 향년 79세를 1기로 서거했다.
인간은 수를 다하면 떠나기 마련이요. 아무도 여기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생전에 세계가 추앙할 만한 위대한 업적을 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드골」장군은 불란서가 낳은 훌륭한 군인이요, 정치가였다. 그의 찬란한 업적은 근대 불란서와 구라파의 역사와 더불어 길이 빛나게 될 것이다.「드골」은 처음 군인으로서 출발했다.
1910년「셍시르」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그 곳을 졸업한 후 제1차,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때 불란서가 항복하자 그는 영국으로 망명, 항 독「레지스탕스」운동을 전개했다.
전후 한 때 불란서의 국가수반으로 취임한 일이 있으나 정계에서 은퇴하였다가 1958년 다시 혜성처럼 등장하여 혼미를 극했던 불 정국을 수습하고 1959연에는 불란서 제5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던 것이다.
「드골」장군은 1969년 4월 상원과 지방제도 개편에 관한 국민투표에서 패배하자 아무 미련 없이 홀연히 하야했지만. 그의 집권11년에 걸친 공적은 불란서는 물론 동·서 세력정치에 극기 적인 전환을 가져오게 했다.
「드골」의 이른바 3A정책(「알지」·「어톰·봄」·「얼라이언스」은 다같이 주효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불란서의 위치는 크게 선양되었다. 뿐만 아니라「드골」은 동서해수에 선구자적 역할을 발휘했으며, 구라파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그런 반면「드골」에 대한 비난도 없지 않았다. 그 개인적인 위신을 지나치게 앞세우는 개인통치, 또는「나토」에 대한 반기, 다원화의 촉진, 중공승인을 비롯한 공산권에 대한 유화정치는 다같이 그 대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드골」은 신념의 정치가였으며 세계를 동찰 하는 일가견 아래 그가 뜻하는 바를 착실하게 실현했으며 그 가운데서도 그의 불란서에 대한 사랑은 그에게서 넘쳐흐르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정치에 있어서의 거취를 분명히 하여야할 때는 깨끗이 물러났다.
그가 남긴 장례유언을 보더라도 그의 인품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는『대통령·각료·의원·정부기관 대표들이 참석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는가 하면『나는 「프랑스」이건, 미국에서 나를 위한 공훈인정, 승진, 포장 훈장 수여를 거부함을 미리 밝혀둔다』고 했다.
이제「드골」서거의 비보와 더불어 세계는 숙연히 애도의 뜻을 표명하여 그의 업적을 찬양하고 있다.「드골」이 그의 조국 불란서에 바친 애국정성, 그 겸허하고 고매한 인격은 누구나 본 받을 만한 것이다.「드골」의 서거와 더불어 뭇 인간이 찾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우선 이러한 것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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