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선진국 대접받는 한국경제, 반갑기만 한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윤창희
경제부문 기자

‘20년 전 가격 그대로’.

 대형 유통업체에서 종종 하는 이벤트 행사다. 복고풍 향수를 자극하면서도, 절반 값에 물건을 살 수 있다는 알뜰심리에 호소한다. 한 도시락업체의 20년 전 전단지를 보니 정말 싸다. ‘콩나물국밥 970원, 굴비도시락 1500원…’.

 이런 ‘타임 마케팅’이 가능하지 않은 나라가 일본이다. 20년간 물가가 전혀 오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일본 국민음료 야쿠르트가 11월부터 값을 올린다는 소식이 주요 외신을 타는 걸 보니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35엔짜리 유산균 음료 한 병에 단돈 5엔을 더 받는데 22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셈이다.

 그런데 어느 ‘달나라 얘기’쯤으로 치부했던 일본식의 물가하락(디플레이션)이 우리에게도 현실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10개월째 1%대에 머물고 있는 소비자물가 상승률, 그리고 회복 기미가 안 보이는 부동산 시장을 놓고 일본 장기불황의 초기 국면과 흡사하다는 ‘방정맞은’ 분석들이다.

 콩나물국밥이 세 배나 오른 건 우린 소시민들에겐 반갑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그건 경제성장의 결과기도 하다. 20년 동안 우리 소득도, 아파트값도 같이 올랐다. 그렇다면 최근의 이례적인 물가안정이 저성장 국면에서 소비와 투자 등 수요 감소와 함께 오고 있다는 건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불황 속에 지속적인 물가하락을 의미하는 디플레이션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동안 확실한 파워를 입증했다. 물가가 떨어지면 돈 가치는 올라간다. 당연히 소비를 늦추고 현금을 보유하려 한다. 너도나도 자산매각에 나서면서 자산가격은 떨어지고, 이는 다시 수요 위축과 물가하락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

 우리나라 현실과는 아직 거리가 있는 일본식 디플레를 떠올리는 건 우리도 일본처럼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곪고 있는 외화내빈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한국 경제의 외형적 모습은 분명 좋아졌다. 금융시장에선 이미 선진국 대접을 받는다. 최근 바이 코리아세는 3년 만에 가장 강하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달라진 코리아를 느낄 수 있나. 외환보유액은 넘치고, 경상수지 흑자는 쌓인다지만, 가계의 마이너스 잔고는 늘고 있다. 삼성전자는 사상 최대 실적을 이어가지만 실업자는 늘고, 구조적인 내수 부진에 자영업자들은 벼랑 끝으로 몰린다. 국가 신용등급은 올라가는데 내 신용은 나빠졌다. 이거 도대체 무슨 일인가. 파이낸셜타임스는 신흥시장이 흔들리자 투자자들이 ‘코렉시코(Korexico·한국과 멕시코)’로 몰려가고 있다면서도, 코렉시코는 어디까지나 단기간 은신처(hide-out)지 최종목적지는 아니라고 일갈한다. 무역에 편중된 경제구조, 그리고 낮은 성장성과 양극화 탓이다.

 원인과 해법 모두 자명하다. 수출과 제조업 일변도의 성장 엔진만으론 더 이상 안 된다는 것, 그리고 가속도가 붙은 고령화 추세와 굳어지는 저성장·양극화 기조를 탈피할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추석들 잘 보내시길.

윤창희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