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치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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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민족적 영웅이 없는 나라처럼 메마른 나라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영웅은 난세에나 빛을 보게 된다. 그리고 난세에 빛을 보는 영웅을 탄생시키기 위해 제일 큰 시름을 겪어야 하는 게 백성이다.
정사에서는 백성의 시름은 무시되는 게 보통이다. 그저 영웅이나 임금들의 업적만이 기록된다. 그렇다고 그러한 영웅개인의 힘만으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분명히 이순신과 권율은 나무랄 데 없는 우리의 영웅이다. 그러나 이들의 힘만으로 왜군이 막아진 것은 아니다. 기댈 수 있는 백성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도 비로소 빛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1592년 왜군이 쳐들어오자 선조는 평양에서 의주로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이때 백성을 생각하지 않는 임금이라 하여 길가의 백성들이 돌을 던졌다. 왜 난의 첫해에 패주만을 거듭했던 것은 왕이 백성을, 그리고 백성은 왕을 버린 때문이었다.
진주성의 싸움, 노양 해전, 그리고 행주산성의 싸움에서의 대첩들은 모두 이순신, 권율 장군과 같은 영웅들에 의한 것이었다. 이것은 어김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들이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하더라도, 역시 이름 없는 백성들의 뒷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행주싸움이 있기 전에 권율은 독산을 지킨 일이 있다. 이때 왜장 가등 소정은 물이 마르면 항복하리라 생각해서 이곳을 포위했다. 이것을 알아챈 그는 일부러 달 밝은 밤에 산상에서 말을 물로 씻어 물이 흔한 채 하였다.
이래서 가등이 제 발로 물러갔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권율은 지장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행주산성싸움에서 12시간이 넘도록 파상적인 공격을 가해온 3만여의 왜군을 물리치는데는 백성의 힘이 컸다. 이때 노인들은 주먹밥을 날랐고, 어린이들은 물을 길어 날랐고, 부녀자들은 치마 앞에 덧 치마를 두르고 여기에 돌을 날라 병정들로 하여금 화살대신으로 싸우게 하였다. 이때부터 행주산성의「행주」를 따서「행주치마」라는 새로운 앞치마가 생겼다는 얘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10일 행주대첩을 기념하는 유적보수 정화공사의 준공식이 행주산성의 옛터에서 열린바. 뜻 깊은 일이다. 그러나 새로 세워진「행주대첩 비」에도 권율장군의 얘기만이 적혀 있다.
어쩐지 서운한 느낌이 든다. 이제 행주치마의 모습은 볼 수 없어도 행주치마에 얽힌 정신만은 언제까지나 살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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