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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일본의 책임은 크다.
▲영목일씨의 담=지난 1964년 11월22일 이은 전하 내외분은 무사히 한국에 돌아가시었다. 나는 하네다 공항까지 나가서 전송하였는데 아드님 이 구씨까지 세 사람을 태운 일본항공의 특별 기가 멀리 창공을 날아가는 것을 보고 나는 나도 모르게<아아 잘 되었다>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그것은 그때까지 십 수년 동안 나의 머릿속에 왕래하던 하나의 현안이 겨우 해결된 기쁨이었으리라.
나는 유감이지만 한일사우당시의 일을 잘 모른다. 소학생 때의 일이므로 겨우 제등행렬과 기념의 그림 엽서를 기억할 정도이다. 그리고 통감의 제복을 입은 이등 박 문에게 안겨 있는 것같이 서있는 소년 이왕 세자 전하의 사진이 신문과 잡지에 크게 났던 것이 생각난다.
내가 좀더 나이를 먹었었더라 면 당시 일본인의 기쁨의 표정이라든가 아니 그 보다도 나라를 잃은 한국인의 심정 같은 것을 자세히는 알았을 터인데 그런 일에 대하여서는 아무 기억이 없다.
소화의 연대로 들어가서 나의 부친(해군대장 영목관태낭)이 해군 군령부장에서 시종 장에 취임하면서부터 지금까지는 인연이 멀었던 황실의 여러 가지 이야기가 직접 들려왔다. 이왕 가는 큰 부자라든가, 정월에 세배를 하려고 각 궁가를 돌 때에 보면 이왕 가의 손님이 제일 많이 그것은 좋은 음식이 많이 나오는 때문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리고 아까사까의 이왕 저(지금의 프린스·호텔)는 동경에서도 가장 경치가 좋을뿐더러 영국식의 우아한 양 관은 점차 나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주게되었으며 농림 생 축산 국에 근무하고 있던 관계로 이왕 가의 난 곡 목장의 일도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정말로 이왕 가의 일을 알게된 것은 종전직후 내가 궁내 청으로 들어간 뒤부터였다. 당시 맥아더 사령부는 자꾸 명령을 내어서 황족도 몇 분의 친 왕을 재하고는 모두 신 적 강하를 하게되었으므로 왕 공 족으로서 일본황족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온 이왕 가는 금후 과연 어떻게 될까하고 우리들은 우리들대로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패전이라는 것이 조선사람들 에게는 마치 36년간의 암흑 속에서 다시 광 명한 태양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을 것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으나 이왕 가로서는 어떠한 마음으로 해방을 맞이하였을까? 참으로 복잡하기 짝이 없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우리들에게 비밀히 들려온 정보로는 좌우양익과 이왕 가의 복벽(복사=물러났던 임금이 다시 왕위에 오름)을 꿈꾸는 사람들로부터 상당한 유혹과 음모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왕 전하는 종시 일관 아무태도의 표명이 없으셨고 끝까지 정치를 초월하여 한 시민으로서 안온하게 살려고 하신 것은 매우 현명한 일이었다고 할 것이다.
일본국내에서는 신적 강하로 10명의 황족이 일개 평민이 되었고 그때 상당한 강하자금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왕 공 족에 대하여서는 아무 조처가 없었을 뿐더러 그때까지 지급되던 궁내 청으로부터의 생계비와 서울에 있는 이왕 직으로 부 터의 송금도 두절케 되니 이왕 전하의 생활은 참으로 『딱하다!』는 한마디 밖에는 말할 수가 없게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10윌 나는 일본에 처음으로 생긴 출입국 관리 청 장관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입관」의 일이란 한국인에 관한 것이 대부분 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의 한국학인문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시대에는 웬일인지 이왕 가에 대한 대우가 극히 냉혹하여 아들 구씨의 졸업식에 가려고 해도 여권을 내어 주지 않아 부득이 일본여권으로 미국에 간 일이 있기 때문에 이왕 전하는 한때 국적이 일본으로 바뀐 일도 있었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따뜻한 배려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가서 떳떳한 한국인으로 여생을 마치시게 된 것은 크나큰 행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왕 전하가 귀국하시기 직전에 일본정부에서 부랴부랴 임시 각 의를 열어 예비금 중에서 1천 8백만 원을 전별 금으로 드리기로 하고 비행기까지 전세로 얻어 드린 것은 지금까지 의무를 다하지 않은 속죄라고 할 것이며 물론 그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나는 그 소식을 듣고 한사람의 일본인으로서 참으로 잘되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영 목 씨는 현재 일-한 친화 회 회장으로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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