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토박이 시대, 귀향길 짧아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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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잠실에 사는 김형식(55)씨는 고향이 경북 안동이지만 추석과 설 명절에 고향을 찾지 않는다. 추석 당일이 되면 제사를 지낸 뒤 경기도 남양주의 공원묘원의 아버지 산소를 찾는 게 전부다. 그는 3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화장해 납골당에 모셨다. 안동에 선산이 있지만 추석 연휴 때는 찾아가지 않는다. 추석 2~3주 전 일가친척과 벌초를 다녀오는 것으로 갈음한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김씨의 장남 성준(28)씨는 그나마 벌초에도 잘 따라가지 않아 선산의 산소 위치도 기억하기 어렵다.

 21세기 한국 사회의 명절 귀향(歸鄕)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해마다 명절이면 고속도로는 여전히 귀성 인파로 붐비지만, 관련한 각종 통계를 찬찬히 뜯어보면 귀성 트렌드가 변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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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도로공사 산하 도로교통연구원 교통연구실은 16일 ‘추석 명절 기간 고속도로 통행 패턴’이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1998년 이후 15년 동안의 출발지와 목적지가 나와 있는 고속도로 교통량 빅데이터(Big-data)를 분석한 결과다. 98년은 도로공사가 통행료징수시스템(TCS)을 본격적으로 가동한 해다. TCS는 고속도로 교통량 속 차량의 종류와 시간대, 출발지와 목적지, 이동 시간 등의 정보를 컴퓨터 파일 형식으로 생산한다. 매일 380만 대의 차량이 전국 318개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오가면서 남기는 이 데이터는 경기도 동탄의 도로교통연구원 컴퓨터 시스템 ‘오아시스’에 기록된다. 교통연구실은 교통량 외에도 거주지·출생지를 보여주는 인구 통계와 매장·화장 통계로 부족한 점을 보완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추석 때 귀향이 사라지는 현상을 세 가지 통계로 읽을 수 있다. 첫째는 ‘사는 곳 주변에서 움직인다’는 특징이다. 교통연구실은 한국 사회를 지리적으로 서울·인천·경기도를 포함한 수도권과 충청·전북·전남·경북·경남·강원도·제주도 등 8개 권역으로 나눴다. ‘사는 곳 주변에서 움직이는’ 특징은 국내 인구의 절반이 사는 수도권에서 뚜렷하게 감지됐다. 지난해 추석 기간에 수도권 내에서 움직인 비율은 98년 대비 19% 늘었다. 수도권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경남권(부산·울산·경남) 역시 절대수는 수도권에 못 미치지만 30%나 급증했다. 해가 갈수록 먼 거리 귀성 인구가 줄어들면서 명절에도 지역 내에서 움직이는 경향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이 같은 분석은 명절 기간 평균 통행 거리에도 뚜렷이 나타났다. 1년 전체의 하루 평균 통행 거리는 최근 4년간 평균 55㎞ 정도로 큰 차이가 없지만, 추석 기간 하루 평균 통행 거리는 2005년 80㎞에 가깝다가 이후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2011년 이후엔 70㎞ 아래로 떨어졌다. 잠실 김씨는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명절이 되면 부모님을 모시고 안동의 큰집(본가)으로 내려갔지만, 이제는 그럴 일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오는 ‘역(逆)귀성’ 역시 해가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역귀성 비율은 2008년 10%였지만, 2011년에는 19%까지 늘었다. 특히 추석 이틀 전의 경우 수도권에서 빠져나가는 차량은 10년 전보다 1.5배 증가한 반면, 들어오는 차량은 2.3배 증가했다. 도로교통연구원 정소영 선임연구원은 “열 명 중 한 명 이상이 부모나 친지가 역귀성하기 때문에 귀성을 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도로교통연구원은 역귀성 및 지역 내 이동 교통량 증가의 원인에 대해 90년대 후반 이후 수도권을 중심으로 거주지와 출생지가 같은 사람이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잠실 김씨의 아들 성준씨처럼 부모 고향은 지방이나, 본인은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는 얘기다. 인구 통계에 따르면 수도권에서 태어나 수도권에 살고 있는 30~50대는 90년에 수도권 전체의 39%(262만 명) 수준이었지만, 2010년에는 46%(523만 명)로 급증했다. 이들이 부모 세대보다 고향에 대한 의식이 희박해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화장 위주로 급속하게 변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장례 문화도 명절 패턴 변화에 영향을 준다. 98년 ‘화장 후 납골’ 수가 전국적으로 2만4515건, 수도권은 8989건에 불과했지만, 2011년에는 98만 건, 35만 건이다.

도로교통연구원 남궁성 교통연구실장은 “고향이 아닌 사는 곳 주변 납골당에 모시는 사례가 많아지니 자연스럽게 명절에 이동 거리가 짧아질 수밖에 없다”며 “귀성전쟁이란 단어는 머지않은 미래에 듣기 힘들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세종=최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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