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파리행 기차를 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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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꿈은 현실의 어머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지도자에 대한 평가도 이상과 꿈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

김대중 대통령은 5년 전 코리안들이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을 철의 실크로드로 달리는 '꿈같은 꿈'을 우리 앞에 제시했었다. 그러나 그는 유라시아시대 개막의 큰 전제가 되는 남북 화해의 이상이 북핵 위기와 대북 비밀송금의 먹구름에 가린 안타까운 상황에서 청와대를 떠났다.

*** 쉽지 않은 동북아시대 개막

노무현 대통령이 동북아시아 시대의 실현을 대표적인 국정목표로 제시한 것도 핵 위기에 불안하고 세대간.지역간.계층간 갈등에 지친 국민에게 필요한 원대한 이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盧대통령의 설명대로 한반도는 유라시아의 대륙세력과 태평양의 해양세력이 마주치는 전략적인 요충에 자리잡고 있다. 서울을 중심으로 반경 1천2백㎞ 안에 사는 7억의 인구는 미국과 유럽연합(EU)을 합친 인구보다도 많고 동북아시아의 경제 규모는 세계 경제의 5분의1을 차지한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증진으로 서해안 시대가 열렸다. 북한과 일본의 관계가 정상화되면 동해안 시대의 개막이 기대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광양만에서 부산항에 이르는 남해안경제권과 동.서해안 경제권이 연결돼 한반도가 동북아시아 금융과 물류의 중심지로 떠오르는 것도 실현 불가능한 꿈은 아닐 것이다. 부산에서 프랑스의 파리로 가는 기차표를 사서 평양 신의주, 중국, 몽골, 러시아를 거쳐 유럽의 심장부에 도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북아시아 시대를 여는 데는 결코 쉽지 않은 조건이 있다. 그것은 남북화해다. 盧대통령 자신도 후보 시절이던 지난해 9월 아시아.유럽 언론인포럼에서 동북아시아 시대의 구상을 처음 구체적으로 밝힌 연설에서 남북관계의 개선 없이 동북아시아 시대의 실현은 불가능하다는 뜻으로"남북 공동의 집짓기는 동북아시아 마을을 만들어가는 동시병행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현실의 조건은 어떤가. 북한과 미국은 핵 문제를 둘러싸고 날이 갈수록 가파른 대결 국면을 달리고 있다. 최근 들어 미국은 점점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용으로 핵 카드를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핵무기를 보유할 생각으로 그러는 것이라는 쪽으로 인식을 바꾸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보유는 미국이 모든 수단을 다해 저지할 사태다. 모든 수단에는 북한 핵 시설에 대한 공격도 포함된다. 북한을 공격하면 한반도에는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盧대통령의 판단이고, 그래서 그는 미국이 무력 사용을 고려하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

북핵에 관한 한국과 미국의 입장 차이는 심각한 정도다. 거기에 미국인들의 신경을 크게 건드리는 한국의 반미감정이 가세한다. 그리고 한.미관계는 평등해야 하고 한국과 미국이 중요한 문제에서 입장을 달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盧대통령의 발언들을 미국은 선의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盧대통령은 정치적으로는 동북아시아 평화협력체를, 경제적으로는 동북아시아 개발은행과 철의 실크로드 개발.운영을 위한 국제컨소시엄 창설을 구상한다. 거기에는 일본은 물론 중국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 한다. 미국은 미국이 빠진 동북아시아 국가들만의 협력체제에 항상 신경을 곤두세운다.

*** 韓·美관계 복원이 급한 까닭

미국은 한국에 민족주의 색채가 강하고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인 대통령이 등장해 한.미관계를 재조정하고 한.중관계를 강화하는 사태를 걱정한다. 어떤 논객들은 벌써 한국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보호자'를 교체하려고 한다는 악의적인 주장을 편다.

그들은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미국의 방어선을 일본이나 대만해협 쯤으로 옮기라고 말한다. 1950년 초 한국을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해 북한의 남침을 초래한 애치슨 선언의 복사판 같다.

미국이 심통을 부리면 남북화해도, 동북아시아 시대도 어렵다. 한.미관계의 복원이 급하다. 盧대통령의 취임사에서 한.미관계에 관한 언급이 네개의 문장으로 간단히 끝난 것은 유감이다. 파리행 기차를 타기 전에 워싱턴 가는 비행기를 타는 것이 순서일텐데…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