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체 높은 공작이 ‘예약’해 두고 간 명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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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호 27면

황금빛 레이블에 네 사람이 등장한다. 이 중 품위 있는 귀족 같은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와인을 받아 시음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 전형적인 도해(그림을 그려서 상황을 설명하는) 스타일이다. 이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와인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김혁의 레이블로 마시는 와인 <21ㆍ끝> 리제르바 두칼레

레이블의 주인공은 리제르바 두칼레(Riserva Ducale). 이탈리아 키안티 지방에서 최초로 자신들의 와인을 세계로 수출한 루피노 와이너리가 생산하는 와인이다. 루피노와 일라리로가 1877년 세운 이 와이너리를 1913년 지금의 오너인 폴로나리 가문이 구입했다. 리제르바 두칼레는 1927년 첫 빈티지를 출시했고 지금까지 같은 레이블을 사용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와인 자체의 이름에 ‘리제르바’란 단어가 들어간다는 것. 보통 이탈리아 원산지 표기에서 리제르바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평균 숙성기간보다 더 오래 숙성을 시켰다는 의미다. 그 때문에 일반 규정상 이름으로는 사용하지 못하게 돼 있다. 그런데 이 와인은 리제르바 두칼레로 표기하고 있다.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18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탈리아 북서부 아오스타(Aosta) 지역의 한 공작이 성지순례를 위해 바티칸으로 가다가 루피노의 와인 저장고에 들르게 됐다. 와인 맛에 반한 공작은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누구에게도 팔지 말고 보관(Reserve)해줄 것을 요청했단다. 이 때문에 셀러에 백묵으로 적혀 있던 ‘공작을 위해 보관된 와인’이란 문구가 효시가 되었다고 한다. 두칼레는 공작(듀크)을, 리제르바는 예약(리저브)을 의미한다.

이런 100년 이상 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초창기 루피노에서 레이블을 제작했다. 누가 디자인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공작을 형상화한 레이블 덕분에 값싸게 여겨져 왔던 키안티의 와인은 귀족들이 즐겨 마시는 와인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이런 공로 덕분인지 이탈리아에서 제품 이름에 리제르바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 와인이 유일하다.

현재 리제르바 두칼레 와인 시리즈에서 최고급에는 ‘오로’(Oro·황금)란 단어가 더 붙어 있다. 같은 그림을 좀 작게 황금색으로 디자인했다. 필자가 10년 전 토스카나에 있는 루피노 본사를 방문했을 때 오래된 리제르바 와인들을 셀러 마스터와 시음한 적이 있다. 가장 인상 깊은 맛은 1985년과 1977년이었다. 당시 마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산지오베제가 최고의 와인을 만들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토양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산지오베제가 최고의 토양을 만나면 그 어떤 와인보다 경이로운 와인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필자는 그 자리에서 그의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런 그의 믿음은 1895년 리제르바 두칼레가 프랑스 보르도에서 샤토 라피트 로췰드, 샤토 마고와 같은 특급 와인들과 경쟁해 금메달을 수상하면서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기본에 충실한 리제르바 두칼레는 ‘루피노의 와인이 키안티의 교과서’란 별명을 얻게 하는 데 일조했고 더 나아가 가장 우수한 키안티 리제르바 와인임을 입증했다. 역사를 이야기하는 레이블, 시간은 이미 흘러갔지만 우리들은 공작의 마음으로 이 와인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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