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공격 안보리서 막판 외교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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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이라크 공격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막바지 외교전이 치열하다. 미국과 영국.스페인이 24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 무력에 의한 이라크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새 결의안을 상정하자 독일과 프랑스.러시아는 이라크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각서를 제출했다.

제러미 그린스톡 유엔 주재 영국대사가 안보리에 새 결의안을 내놓기 직전 이들 3국이 제출한 각서는 ▶군사행동은 최후의 수단이며 ▶사찰을 최장 4개월 연장해 무장해제를 추진하자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결의안과 각서의 의미=미국 등이 제출한 결의안은 이라크 무장해제에 관한 과거의 결의들을 상기하는 데 대부분을 할애한 뒤 "이라크가 안보리 결의 1441호에 의해 부여된 마지막 기회를 잡지 못했다"는 문장 하나만 새로 추가했다. 즉 이라크가 무장해제 결의를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심각한 결과(serious consequenses)'를 피할 수 없게 됐다는 논리다.

동맹국들의 반대를 의식해 군사행동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이라크의 결의 위반을 기정사실화함으로써 사실상 개전 선언을 한 셈이다.

그러나 전쟁에 반대해온 프랑스와 러시아.독일은 유엔 무기사찰단이 가시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만큼 사찰을 연장해 이라크의 평화적 무장해제를 모색하자는 내용의 각서를 먼저 제출함으로써 선수를 쳤다. 비록 국제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미국의 행보에 정면으로 맞선 행동이다.

양측 입장이 팽팽히 대립되는 만큼 다음달 7일로 예정된 사찰단의 최종 결과 보고까지 2주 남짓한 기간 중 안보리에서 우세를 점하기 위한 양측의 치열한 공방이 예상된다.

첫 격돌 지점은 다음달 1일로 다가온 이라크의 미사일 파기 시한. 이라크가 사찰단의 요구를 받아들여 미사일을 파기하면 '각서파 국가들'이 힘을 얻겠지만 이라크가 이를 거부하면 사찰단 최종 보고는 이라크에 부정적인 내용으로 귀결될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되면 그 직후 이어질 결의안 표결에서 미국의 주장에 결정적 힘이 실리게 된다.

◇미국, 약소 이사국 압박 외교=15개 이사국으로 구성된 안보리에서 결의안이 통과되려면 상임이사국 5개국의 비토(거부) 없이 9개국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현재 미국을 따르는 나라는 영국.스페인.불가리아 등 3개국뿐이다.

따라서 미국은 칠레.멕시코.기니.앙골라.카메룬 등 약소 이사국들에 고위 관리나 사절단을 파견해 설득에 나섰다. 미국은 "이라크전에 반대하면 값비싼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고강도의 압박 외교를 펼치고 있으나 평소 미국의 관심권에서 소외돼온 아프리카 3국은 "찬성에 따른 급부를 보장해 달라"며 고자세로 나오고 있다. 남미 2개국도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미국의 속을 태우고 있다.

미국은 5개국의 찬성을 바탕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상임이사국들인 프랑스.중국.러시아를 압박해 기권을 유도함으로써 결의안을 통과시킨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5개 상임이사국 중 3개국이 사실상 반대를 의미하는 기권을 함으로써 통과된 결의안이 얼마나 설득력을 갖겠느냐는 지적도 부시 행정부 내에서 나오고 있다.

◇결의안은 이라크 아닌 안보리 압박용=이에 따라 미국은 결의안 통과 여부와 관계없이 전쟁을 밀고 나간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유엔의 미국 관리들은 안보리 이사국 대표들에게 "전쟁은 이미 결정된 것이고 이번 결의안은 안보리가 미국을 따를지 말지를 결정하라는 의미일 뿐"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고 워싱턴 포스트가 25일 보도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새 결의안은 유엔이 21세기에 적절한 국제기구인지를 결정하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포스트는 "미국은 안보리 표결에서 질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되면 아예 투표 절차를 생략하고 3월 초에 이라크를 단독 공격하는 방안까지 고려 중"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24일 미 ABC 방송과 워싱턴 포스트의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56%가 "이라크전을 위해선 유엔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응답한 데다 유일한 동맹국인 영국이 사상 최대의 반전 여론에 직면해 있는 만큼 미국이 유엔의 동의를 얻지 않고 공격할 경우 져야 할 부담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베를린=김종혁.유재식 특파원, 강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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