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덕과 결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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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우리는 후덕한 백성이다. 친구끼리 다방이나 식당에 가서 음식을 들고나올 때엔 저마다 서로 돈을 내려고 기를 쓰고 달려든다. 더치·페이라는 양풍이 어딘지 모르게 소인적이고 박절하게 느껴지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런가하면 우리에겐 이상한 결백성이 있고 도의에 대한 존중이 있다. 민주의 본산이라는 영국의 교사들이 월급을 올리라고 수상관저 앞에서 데모를 하는 꼴을 보거나 미국의 교사들이 대우 개선을 부르짖다가 어린 제자들을 버리고 파업을 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사도의 퇴색을 개탄하고, 돈만 아는 양인들의 물질주의를 비웃기도 한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얼마 전 우리 백의의 천사들이 파업을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파리의 경찰관들이 파업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와 비슷한 허탈을 느꼈다.
모두들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고 혀를 찼다. 몇 푼 더 받겠다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몸부림치는 환자들을 버리고 파업을 하다니 인술은 다 어디 갔고 나이팅게일 정신은 또 어디 갔느냐는 눈치였다. 『돈 몇 푼 더 받겠다고』라는 것이 이럴 때 쓰이는 상투어이다.
이번에는 귀한 자식들을 잃은 부형들이 위자료문제를 놓고서 당국과 승강이를 하는 바람에 장례식이 근 다섯 시간이나 늦추어 졌다. 위자료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 같으면 달라고 요구하기는 커녕 준대도 깨끗이 안 받을 것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조차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천만금을 준들 자식을 잃은 슬픔이 가시겠느냐고도 했다.
더치·페이를 째째하다고 생각하는 후덕은 좋다. 『돈 몇 푼』보다 인술과 사도와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사랑을 더욱 높고 귀하게 여기는 도의와 결백성도 좋다. 이와 같은 것이 우리가 현대화하기 위해서 반드시 익히고 배워야 할 합리주의와 상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함께 가야 하지 않을까…. 자기체면을 세우기 위해서, 또는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만 후덕을 베풀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기왕 올려 주어야 할 봉급이라면, 또 기왕 납득할 수 있는 액수의 위자료를 주어야 한다면, 파업이니 승강이니 하는 소란이 일어나기 전에선 뜻 내주어야 하지 않는가. 인색한 심사로 남의 행동이나 동기에 대해서 결백성을 발휘하는 것은 잘못이요, 더군다나 현대화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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