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상흔 그 자리엔 불탄 성경, 멈춰선 시계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개리 수손은 “‘안네의 일기’ 주인공 안네 프랑크의 박물관을 우연히 들렀다 작은 박물관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다”고 했다.

미국 뉴욕의 패션거리 첼시의 밋패킹 디스트릭트. 즐비한 옷 가게 틈새에 ‘그라운드제로 뮤지엄 워크숍’이란 생소한 간판이 걸려있었다. 92㎡ 작은 방에 들어서자 100여 점의 사진과 9·11 테러 희생자의 유품, 건물 잔해가 빼곡하게 전시돼 있었다. 왼쪽 벽에 걸린 달력과 시계가 이내 시선을 붙잡았다. 2001년 9월 11일. 그 옆 벽시계는 10시2분14초에 멈춰 있었다. 12년 전 두 차례 항공기 테러 후 남쪽 건물이 무너지며 전기가 끊긴 바로 그 순간이다.

 2005년 자비를 털어 이 박물관을 연 사람은 개리 수손. 그는 2001년 9·11 테러 직후 뉴욕 소방관 노조의 의뢰로 8개월 동안 현장의 참혹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테러 현장의 유품이나 잔해는 외부 반출이 금지됐지만 그에겐 일부 허용이 됐다. 2004년 그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사진과 유품 등을 들고 뉴욕의 내로라하는 박물관을 찾아 다녔다. 후손들에게 9·11 현장 그대로를 전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9·11과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싸늘한 답변만 들었다. 실의에 빠진 그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훌쩍 여행을 떠났다. 거기서 ‘안네의 일기’ 주인공인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 박물관을 우연히 들렀다. 안네가 숨어 있었던 다락방과 일기를 보고 돌아온 그는 호텔에서 한참 울었다. 수손은 그 순간 “작은 박물관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다”고 말했다.

9·11 테러 현장에서 발견한 성경.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전 재산을 털어 첼시 패션가 2층에 공간을 마련했다. 2001년 그 건물 옥상에서 그는 쌍둥이빌딩이 무너지는 순간을 촬영했다. 그의 뜻에 공감한 건물 주인은 임대료를 반으로 깎아줬다. 사진과 유품·잔해 등을 전시하고 9·11을 설명하는 다큐멘터리 동영상도 직접 만들었다. 쌍둥이빌딩이 무너질 때 떨어져 나온 52㎏짜리 거대한 유리벽 조각은 현재 남은 유리 파편 중 가장 크다. 테러에 이용된 여객기 잔해는 소방관 노조가 대여해줬다.

 그러나 혼자서 운영비를 감당하는 건 벅찼다. 2001년 그라운드제로에서 일하다 천식에 걸려 받은 산재보상비까지 박물관에 털어 넣었다. 그라운드제로에 짓고 있는 9·11 박물관 개장이 늦어지면서 그의 작은 박물관을 찾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다.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생생한 9·11 테러 현장 사진과 실제 유품·잔해를 만져볼 수 있다는 입소문이 돈 덕분이었다. 이후 뉴욕타임스(NYT)와 CNN·폭스 등 방송에 소개되면서 뉴욕의 명소가 됐다.

 그는 불타다 남은 성경책 사진을 지금도 가장 아낀다. 정신 없이 셔터를 누르다 문득 보니 창세기 ‘11장’이 펼쳐져 있었다. 애초에 한 가지 언어를 썼던 인간들이 신에게 도전하고자 바벨탑을 쌓다가 무너진 뒤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서로 다른 언어를 쓰게 됐다는 대목이다. 수손은 “9·11이 우리에게 주는 계시도 인류가 서로 존중하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만들라는 게 아닐까”라고 말했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