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효과 얻어 깊은 호소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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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가을은 시의계절이다. 시의 계절이 따로 있을 리 없고 어떤 이는 봄에 그 영광을 돌리는 이도 있을법하지만, 그러나 「거화취실」의 계절, 정신의 알알이 모두 투명하게 트이어 오는 듯한 가을이야말로 역시 시의 계절이다. 이런 기대 속에서 이 달의 시를 살펴봤다.
시의 효용은 따지고 보면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그 중에 시가 우리에게 주는 기쁨도 빼놓을 수는 없다. 그러면 그 「시의 기쁨」을 이룩하고 있는 것은 또 무엇이겠는가를 따져보면 그것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시의 주제가 얼마나 절실한가하는 (시인에게 있어서나 독자에게 있어서나) 점과 그 절실한 주제의 표현이 얼마나 기교적으로 예리하고 세련돼 있는가하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양자는 마치 정신과 육체와의 관계처럼 서로 떼어놓을 수가 없을 것이고 이 양자가 행복한 결혼을 하고 있는 경우엔 명시가 태어나게 된다. 주제의 절실이란 곧 체험의 깊이이고 기교의 세련이란 그 체험의 무리 없는 여과이기 때문이다. 하나 우리가 시를 읽어서 받는 감동은(이 감동 또한 시의 기쁨의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다)어느 편이냐 하면 내용이 공허한 기교보다는 절실한 내용이 밑받침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하기는 이 말은 소위 시의 시평을 하는 경우를 염두에 두고서하는 말이긴 하다.
이달에 읽은 시중에서 필자가 감명을 받은 시들은 그렇게 봐서 그런지 대개가 우선 이 주제 면에서 호소력이 있는 시들이었다.
이달에 나온 시의 압권은 단연 「현대문학」에 발표된 박두진씨의 『별 밭에 누워』외 5편의 시들이다.
노경의 문턱에 들어서 있을 씨의 감성과 정서가 여전 어린이의 그것처럼 맑고 순화돼 있음을 알 수 가있다. 거기엔 또한 삶의 체험의 깊이와 가다듬어질 때로 가다듬어진 시의 기교가 숨어있기도 하다. 누구나 무심히 바라보는, 그러나 어떤 이도 결코 무심코 바라볼 수만은 없는 밤하늘의 별, 그별 밭에의 맴도는 서정이 담담하고도 절실하게 읊어져 있다.

<너무 맑고 초롱한 그 중하나 별이여 중략>
무심하게 혼자 누워 바라만 보지만/오래오래 잊어 버렸던 어릴 적의 옛날/소년 쩍 그 먼 별들의 되살아 음이여<중략>어떻게도 할 수 없는 소리지름이여>
이런 영탄조가 시의 기조가 돼 있지만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 그러기 때문에 「은유」 의 보고이기도 한별의 서정에는 이런 영탄조가 어울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 밖의 5편의 시에서는 모순이 그 본질이다 시피한 삶(생명)의 현실이 그대로 응시되고 포착돼 있다.
『나비의 죽음에서』그렇고<잉잉대는 이 불티 하나씩의 가슴의 넋 독수리 운다>이런 처절한 귀절이 들어있는 『가장 어질고 착한 이들의 눈에조차』란 시에 있어서도 그렇고 또한<서성대며 뜰에 혼자 오늘 이 새벽 먼바다 너의 모습정한 눈어림 1행략 뉘우침에 그냥 눈물 머금는다>이런 귀절이 들어있는 『난에게』란 시에 있어서도 그렇다. 『예리미아의 노래』는 약1백 행의 장중한 역편이다. 짧은 행으로 「템포」가 빠른, 매우 박력있는 특징있는 시다.
「예례미아」는 구약에 나오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슬픔과 눈물의 예언자이지만 이 시에선 유대민족의, 수난이 그대로 이 무기적 시대의 「생명」의 수난, 그러면서도 결코 굴할 줄 모르는 생명의 영광으로 대치 돼있다. <그것은 일어나리 배암은 배암끼리 늑대는 늑대끼리 …>하는 그것이란 곧 생명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그 생명이 『풀뿌리 나무뿌리』에서나, 『대리석에서 콘크리트에서』나 일어나리라고 예언한다. 삶의 모순이 파헤쳐져 있는데서, 이 시엔 삶의 비극이 자주적으로 포착돼 있다.
「현대문학」에 실린 최원규씨의 『어둠 속에서』 또한 감명 깊은 시다. <나의 멍청한 얼굴과 혼탁한 목소리를 만드신 나의 가슴에 고뇌의 꽃과 그 꽃의 그늘을 당신은 지금 내 앞에 보이지 않으나>하는 당신은 아마 시인의 어머님에 대한 「이미지」일 것으로 여겨진다.

<나의 둥근 머리통에 노란 황금을 녹여 가득 채워 주신 당신><대장간의 뒤 뜨락 중략 그 꼬딕의 쇠붙이를 하나씩 주워 나의 호주머니에 넣어준 당신…>이런 매혹적인 귀절은 참으로 음미해 볼만하다. 허나 이런 귀절의 묘미도 묘미이려니와 시 전체에 흐르고있는 짙은 정서의 밀도에서 우리는 시의 감정과 기쁨을 얻게되는 것이다.
「월간중앙」에 실린 장만영씨의 『꽃들』도 독자에게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시다. 씨는 시단의 선배이겠으나 삶에 시달려서 시점을 잠시 『가난과 인내와 눈물 속에서』피어난 꽃에 돌려서 그 꽃을 「눈동자」와 「보석」과 「별」로 비유하는 단순, 소박한 그러면서 맑은 체념이 깃들여져 있는 이런 시를 통해서 씨의 감성을 느낄 수가 있다. 뭣인가 우리의 마음을 맑게 해주는 시다.
같은 월간지의 정현종씨의 『그리움의 그림자』는 「그리움」이 철학적인 상념을 통해서 매우 지적으로 투명하게 가다듬어져 있다. 개념과 언어의 적절한 밀착이 씨의 「데상」을 짐작케 하나, 뭣인가 좀 더 깊이 파고 들어가 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현대시학」의 한승헌씨의 『백서』도 그 분명한 주제로 해서 눈여겨 보게되는 작품이었다. 차라리 소박하다할 수 있는 수법으로(삶의) 「정답」을 「꽃잎」과 꽃나무의 「뿌리」 「풀잎에 엉키는 이슬 한 방울」에 찾는 그 「온 갈망의 색소」가 윤리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성질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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