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의 반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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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글반포 5백24돌을 기념하는 한글날을 다시 맞는다. 5천년 한국사뿐만 아니라, 세계문화사 전체를 통해서도 불세출의 영주였다고 할 수 있는 세종대왕이 친히 오랜 연구 끝에 창제한 한글의 가치에 대해서는 새삼 중언할 필요조차 없다.
한나라의 문자와 언어체계를 독창적으로 창제함으로써 세계문화사상 거의 유례없는 이적 을 기록했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5백20여년 전에 이미 오늘날의 언어학적 수준으로 볼 때에도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논리성과 실용성을 갖춘 문자체계를 반포하여 문화의 대중화운동에 앞장섰다는 사실 등은 우리가 세계에 대해 아무리 자랑해도 과함이 없을 정도인 것이다.
그러나 한글날인 오늘 우리가 깊이 반성하고, 과단성 있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은, 이 한글의 모체인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본뜻과는 달리 우리는 지금 이 한글로 인하여 도리어 언어생활에 있어 전례 없는 혼란을 겪으면서 기성세대와 자라나는 세대사이에 문화의 단절현상이라는 현실적인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라 할 것이다.
언어정책을 논하면서 그것을 편벽한 애국심이나 도덕문제와 결부시키려는 일부 극렬한 한글 전용론자들의 주장 때문에, 언어문자가 가진 일용성말고서 전통문화의 매개수단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측면이 고의로 무시당함으로써 조성된 오늘의 혼란은 급기야 각급 학교에서 한자교육의 전폐라는 극단을 자행하기에 이르렀고, 이로써 젊은 세대는 신문 한 장, 교양서적 한 권 제대로 못 읽는 반 문맹화하고 있는 기막힌 사태가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엄격히 구별해야 할 것은 한글전용문제와 한자교육의 문제와는 전혀 별개의 것이란 점이다. 누군들 한글 전용으로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뚜렷한 이익에 이론은 없는 것이요, 정부기관의 공용문서나 일상적인 의사표시의 수단으로서의 한글전용을 굳이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본란이 오늘 하루만이라도 순 한글로 신문제작을 하는 것으로도 충분한 의사표시가 되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 싯점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을 가진 어버이와 어른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냉정히 생각하는바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일부 소설류를 제외하고, 적어도 전통문화와 관련이 있는, 일제의 기록들이나 서적들이 한자어에 대한 지식 없이 단 한 줄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에누리없는 우리의 현실일진대, 어찌하여 우리의 위정자들은 자라나는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의무교육과 중등교육을 마치고서도 책 한 권 못 읽는 반 문맹자가 되기를 강요하는 정책을 고집하는 것일까.
한글전용 자체의 가부에 대해서도 아직 논의가 있는 터이요, 또 한글전용을 찬성하는 경우에도 우리말 어휘의 정리와 맞춤법의 손질, 학술용어의 새로운 제정, 외래어·외국어표기방법의 통일, 한글타자기 문제 등 앞으로 해결해야할 많은 문제들이 있는 것이지만, 그것들이 한글전용을 가로막는 근본요인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요컨대 현재·미래에 걸쳐 조속히 중지를 모아 해결하여야 할 문제들이지만, 이 문제와 학교에서의 한자교육의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문제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한글전용을 주장하는 나머지 고등학교의 국어·국사교과서에조차 생경한 한문전적에서의 인용문을 순 한글로만 표시케 한 것을 읽으면서 포복절도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불어나 독일어까지를 정규교과과정으로 가르치면서 우리 나라 학교교육에서 우리의 과거·현재적인 문화적 전통에의 유일한 접근의 수단인 한자교육을 완전히 폐지시킴으로써 자라나는 세대를 사실상 반 문맹자로 만들고있는 정책을 단연 시정하는 결단을 우리는 오늘 한글날에 다시한번 촉구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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