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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국군의 전선정비(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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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진천 공방전(상)>
한강 방어전을 끝낸 국군이 수원을 거쳐 평택으로 후퇴한 것이 7월4일이었다.
이곳에 집결한 국군의 사단 머리수만은 수도·제1·제2·제5·제7사의 5개 사단이었지만 실병력은 반수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5개사를 수도·제1·제2사의 3개사로 축소 재편하여 제1군단을 창설했다.
건군 이래 처음 생긴 군단인 제1군단장에는 김홍일 소장이 임명되고 사단장급도 경질되었는데 수도사에는 예비역에서 현역으로 복귀한 김석원 준장이, 제1사는 백선엽 대령이 그대로 유임, 제2사에는 이한림 대령이 각각 임명되었다.
중부전선의 제6사단(김종오 대령)과 동해안의 제8사단(이성가 대령)은 질서 정연한 접적과 후퇴작전을 감행해서 비교적 편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7월10일을 전후한 아군은 도합 5개 사단으로서 대체로 진천·충주·제천·평해리선에서 전선을 정비하고 유엔군의 내원을 기다리며 지연 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김일성, 서울서 직접 독전>
이때 상황은 미24사단이 금강선에서 고전 중이었지만 북괴군은 미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금강과 소백산맥을 단숨에 돌파하여 남으로 급진하려고 했다.
북괴군 최고 사령부는 7월8일에 소위 제3차 작전방침을 『빠른 공격속도로 적에 맹렬한 타격을 가하고, 금강과 소백산맥을 신속히 돌파해서 대전지역과 소백산맥의 면에서 적의 기본집단을 포위 섬멸함으로써 전주·논산·문경·울진의 남방지역을 해방한다』로 세우고 각 부대에 이를 하달했다.
특히 김일성은 서울에 있는 북괴군 전선사령부에 나타나 『어떤 상황하에서도 모든 수단을 다해서 우회하여 적 후방에 진출, 반드시 적을 포위섬멸하고, 야간행동을 강화하여 공격속도를 한층 빨리 하라』고 직접 독전에 나섰다. 공격속도를 빨리 하기 위해 북괴군은 예비부대인 제15·13사단을 중부전선에 투입했다.

<재편국군, 곳곳서 적과 격돌>
한편 적 남침초기에 부분적으로 선전한 부대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대체로 밀리는 전투를 해왔던 한국군도 평택에서의 재편을 거쳐 이 소백산맥선에서는 북괴군과 격돌하여 곳곳서 혈전이 전개됐다.
우선 진천 전투의 경우를 당시의 참전자 증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장춘권씨(당시 수도사단 18연대 제2대 대장 소령·예비역 육군소장·47) 『진천·청주지구전투는 한마디로 금강방어선 구축을 위해 시간을 벌려는 전투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평택에서 재편한 국군부대가 한강방어전 이래 처음 벌인 대규모의 접전이기도 했구요. 진천에서 2일, 오근장서 1일, 미원에서 2일, 모두 5일간 지연 전투를 했지만 미군의 병력부족으로 금강방어선은 끝내 지키지 못했지요. 그때 부분적으로 백병전과 야습 등으로 제법 치열한 전투를 했고, 또 처음으로 미공군 제트기의 지상엄호도 받았지요. 제트기의 출현으로 아군의 사기는 퍽 올랐지만 실제전과는 크지 못했던 것 같아요. 지대공통신 방법이 없는데다가 조종사들이 한국 지형에 어두웠기 때문이었지요.

<사단장, 백병전위주 작명>
동부와 서부의 미군전선이 진천 전선보다 훨씬 남쪽으로 내려갔고, 적 탱크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후퇴했지만 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진천을 탈환해야 한다고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김 장군의 진두지휘와 독전이 부대사기를 높인 것은 사실이지만 작전지휘에 좀 무리한 점이 있던 것도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대대장인 내가 사단장한테 작명을 받으러 갔더니 10리씩 간격을 두고 2개소대로 공격을 하라는 겁니다. 이것은 백병전을 위주로 한 일본군 무전법이예요.
제원협력을 원칙으로 하는 신식전법에는 맞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어른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 연대장 임충식 대령과 상의한 끝에 제1대대의 병력을 분산 배치하고 내가 거느린 제2대대는 연대 주력이어서 온존해 놓았습니다.

<좌측 노출로 진천도 포기>
미원전투에서는 81mm포로 정확한 사전거리를 재고 있다가 적 탱크 2대가 오길래 집중사격을 해보았어요. 한 대는 캐터필러가 끊어져 멈췄고 나머지는 도망치더군요. 요는 81mm로써도 사정거리만 정확하면 탱크를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때 통신장교 이모중위가 너무 기뻐서 뛰어나가다가 탱크 포격을 받았는데, 전화기를 꼭 쥔 손목하나만 남고 몸뚱이는 온데 간데 없어진 일도 있었지요. 결국 미24사단의 후퇴로 좌측이 노출되어 진천을 포기했지만 모두 용감히 싸웠지요.』
그럼 이제 진천 공격을 담당했던 북괴군 제2사단 포병연대장으로 있다가 부 사단장까지 승진, 그후 자유를 찾아 월남 귀순한 관계자로부터 이 전투 상황을 들어보기로 하겠다.
▲임헌일씨(6·25때 북괴군 제2사단 포병연대장·그후 제24부 사단장·총장·휴전직후 월남 귀순·48) 『7월8일에 북괴군 제2사단은 진천에서 국군 6사단과의 춘천전투이래 두 번째의 강적인 수도사단과 부딪치게 됐습니다. 첫날 1차 공격에서 1개 대대가 전멸하다시피 했고 2차 공격도 실패하자, 사단장 최현(현 북괴 민족보위상) 은 각 연대장에게 마구 욕질을 하면서 어떤 희생을 무릎 쓰고라도 진격하라는 엄명을 내렸습니다.

<북괴군은 퇴노차단 작전>
내가 지휘하는 포병연대는 후방에서 122mm를 가져온 후에야 점차 국군의 화력을 제압하기 시작했고, 보병들은 후방 차단작전으로 점차 성과를 거들수가 있었습니다.
진천 전투에서 2차에 걸친 사단공격이 실패한 후 전면에 소수의 수색대를 배치하고 맹렬한 기만공격을 가하는 한편 후방에 우회 침투시켜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폈습니다. 이 포위우회작전이 완성된 후 전면에 사단 중화기를 총동원하여 화력을 집중시키는 한편 탱크를 투입해서 맹공격을 가했지요.
이때 완전 포위된 국군의 수도사단 약 2개 연대가 무조건 투항 해올 줄 알았지만 국군은 결사적인 항전을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미 공군기 30대 가량이 나타나 맹렬한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하는 바람에 탱크와 포병에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나 자신도 이 폭격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구요.

<비행기 보고 각국 참전 알아>
나는 고지 관측소에서 급강하하는 미군기와 다른 유엔공군기 마크를 보고 여러 나라가 참전했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암담했지요.
미 공군기의 폭격은 1시간 이상 계속됐는데 이틈을 타서 국군은 포위망을 감쪽같이 빠져 나갔어요. 북괴군은 진천 전투에서 병원과 장비를 많이 잃고 진출이 늦었기 때문에 대전총공격에 큰 차질을 가져왔지요. (주=북괴군의 첫 작전계획은 이 제2사단도 대전공격에 참가시키려고 했다. 본연재 71회 참조)그리고 진천에서는 몇 차례 야간을 이용하여 국군 지공대들이 내 연대의 포진지를 기습해 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후방을 갑자기 기습하여 수류탄을 던지는 일이 빈번했으므로 포병도 희생자가 꽤 났지요. 국군 특공대는 수류탄 외에도 카빈을 주로 사용했으므로 이후부터는 국군한테 노획한 카빈은 일체 사용 않기로 했습니다.

<적 포병오발로 보병 큰 손실>
특히 내가 진천 전투에서 잊을 수 없는 일은 국군 특공대의 기습 작전으로 2일간 비상대기를 시키는 바람에 포수들이 긴장과 피로로 포조작에 착오를 일으켜 근탄을 많이 냈고, 이 때문에 우군보병에 많은 손실을 주었습니다. 이 오발사고로 보병연대로부터 빗발치는 항의가 나왔고, 정치보위부의 조사까지 받았지요. 그래서 나는 임기응변으로 증거서류를 불사르고 근탄은 박격포탄이라고 발뺌을 해서 겨우 책임을 면했습니다.
이렇게 고전 끝에 제2사단은 진천·청주를 점령하고 조치원으로 향하러 했으나 사령부로부터 문경·보은을 거쳐 황간에 진출, 경부본선을 차단하라는 작명을 받았지요.
요는 북괴군 제2사단은 재수 없는 사단이어서 침공벽두에 춘천공격 때 국군 제6사단 7연대 반격으로 큰 피해를 본 다음에는 별 저항 없이 남진하다가 진천에서 또 한번 당한 셈이지요. 그 다음 전투부터는 연속 피해를 보았습니다.』
한편 다른 기록을 보면 수도사단과 소수 경찰대는 7월9일에 진천에서 북괴군 제2사단에 매복 반격을 가해 포4문과 차량27대를 노획함으로써 피아간에 공방전이 벌어져 11일 상오까지도 결말이 나지 않았지만 경부본선의 미군이 계속 후퇴해서 북괴군 일부가 수도사단의 좌측 배면을 위협하기 때문에 11일 저녁에 부득이 진천을 포기, 후퇴했다고 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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