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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와 자주외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한국을 둘러싼 제 세력들-. 특히 중국과 일본 등과가 관계는 역사적으로 우리와 뗄 수 없는 연관 속에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최근에 있은 두개의 모임은 70년대의 우리의 좌표를 찾는 하나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크리스천·아카테미 주최>
「한국사와 자주외교」를 주제로 한 크리스천·아카데미 주최 세미나가 11, 12일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열렸다.
주제발표자는 최창규씨(서울대 문리대강사)와 박봉식 교수(서울대 문리대) 그리고 이영희씨(언론인).
「외교사적측면에서 본 한국의 자주외교」를 얘기한 최씨는『역사적으로 한민족의 외교는 확고한 자주의식의 터전 위에서 이루어졌으며 비록 사대라 하나 주체성을 잃지 않은 것이었다』고 주장, 주목을 끌었다.
일찍부터 민족통일국가를 이룩하고 강력한 자주의식을 가졌던 한민족에 있어 조선조의 건국에서 나타난 사대와 19세기 중반의 서구·일본세력 침투시대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의존적이고 비자주적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이럴 때에도『사대질서를 택한 역사상황은 대륙으로부터의 힘의 억압이 아니고 신흥 엘리트가 자기권력을 안착시키기 위해 스스로 택한 것이란 점을 밝혀 낼 수 있다』는 것.
대내적으로 국민에 대한 신임체계를 확보하고 대외적으로 중국으로부터 자주국가로 승인 받아야 할 것이 요구됐기 때문에 이조는 형식적으로 중국에 대한 사대를 표방했지만 그것은 극히 외면적인 것일 뿐이었다. 이들이 통치 이데올로기로 채택한「주자학」은 외족에 대해 저항하고 민족국가로 결집하기를 촉구하는데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사대」는 오늘날 생각하는 것 같은 종속관계가 아니고, 특히 한족에 관해서는 일본·유구 등 20여 조공 국과는 달리 힘에 의한 강국·소국관계이기보다는 이해·예의의 질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860년 이후 근대적 외교질서가 밀려들 때도 대일 관계에 있어서 특히 강화된 역사의식과 자주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을 내려보던 차등질서가 60년 이후부터 76년 강화조약을 계기로 오히려 일본무력의 극복, 경제적 침략에 대응하는 자주·독립정신을 강화하는 데로 변천했고 독립협회라든가 1905년 이후의 의병들은 이런 경향의 대표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의병은 군사적이기보다는 민족자주외교의 주체로 해석된다고 그는 주장했다.
따라서『70년대 우리의 외교는 우리의 책임으로 남고있으며 자주의 정신이 l백년전의 그 정신과 연결된다』고 그는 말했다.
박봉식 교수는「능력과 상황만으로 보아 한국의 자주외교는 가능한가」라는 제목에서 『우리의 국방이 국제적 단위에 포함되는 때문에 장차의 사태변화에서도 변화의 촛점에서서 자주가 전취 되기보다는 강요되는 상황으로 가지 않을 까』고 전망했다.
『우리의 노력으로 전취 할 때 자주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주의 공간은 주어졌지만 그 공간은 강요되고 있는 것일 뿐이다.』미군의 감축 등은 그런 뜻에서 유엔의 틀에서 서서히 우리의 껍질이 벗겨지고 있는 상황의 설명이 된다고 그는 말했다.
여기서 박 교수는『군사적 역할의 해제에서 또 통일을 향한 국면에서 자주의 공간이 열리고있다』고 주장했다.
이영희씨도 한국자주외교의 지위를 설명,『지난 20년 동안의 한국외교는 한마디로 현상유지의 외교였으며 이제 역사에 대해 작용하는 민족적 예지를 발휘, 현상유지의 토대 위에서 현상타파로 나가야한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외교는 무 외교상태, 또는 종속외교 상태를 탈피하고 상황에 직면하는 외교로 전향해야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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