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외교’ 앞세워 원전 세일즈·친구 나라 만들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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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호 03면

박근혜 대통령이 7일 오전(현지시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기에 앞서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로 꼽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찾아 전시실을 둘러 보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최승식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거침없는 ‘역사 외교’ 행보를 과시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6일(현지시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한·독 정상회담을 한 자리에서 “일본이 역사를 바로 보며 미래지향적 관계 발전을 할 수 있도록 해주기 바란다”고 발언했다.

박근혜 대통령, G20 정상회의 이어 베트남 방문

두 정상의 만남을 앞두고 박 대통령이 ‘과거사’ 언급을 할지 외교가에선 주목 대상이었다. 메르켈 총리는 지난달 20일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을 감금했던 다하우 수용소를 찾아 머리 숙여 사죄한 지 보름 만에 박 대통령을 만났다. 외교가 일각에선 메르켈이 일본의 과거사 왜곡을 우회적으로라도 언급할 거라는 관측이 우세했다. 하지만 양자 정상회담에서 제3국을 거론하며 비판하는 건 외교 관행상 터부시된다. 외교부 관계자는 “독일 총리가 이 자리에서 일본의 과거사 문제를 언급하긴 어려울 것”이라며 “제한된 시간 때문에 양국 간 현안을 논의하기도 벅찰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양국 외교 실무진은 회담 전 물밑에서 두 정상이 과거사 관련 대화를 나눌 여지를 논의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래선지 메르켈 총리는 회담 도중 박 대통령에게 “한·일 관계가 어떠냐”는 질문을 던졌고 이에 박 대통령은 일본의 역사 직시를 촉구했다. 메르켈 총리가 한·일 관계를 물은 것 자체가 박 대통령에게 과거사를 언급할 물꼬를 터줬다는 풀이가 나온다. 우리 외교라인에선 박 대통령이 지난 13년간 메르켈 총리를 4차례 만나며 쌓은 우정과 교감을 십분 활용한 셈이다. 이어 박 대통령은 7일 오전 러시아를 떠나기 앞서 러시아 역사·예술의 상징인 국립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둘러봐 또 다른 역사 외교를 펼쳤다.

베트남전 전사자 아들인 박민식 의원 수행
박 대통령의 역사 외교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이어지는 베트남 방문(7~11일)에서도 큰 몫을 할 전망이다. 박 대통령은 새누리당 박민식 의원을 베트남 방문 특별수행자로 지명했다. 박 의원의 선친은 1972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중부 빈딘 지역에서 전사한 고(故) 박순유 중령(맹호부대)이다. 박 의원은 그런 인연 때문인지 한·베트남 의원 친선협회 회원이다. 박 대통령은 박 의원 대동을 통해 베트남에서 양국 간의 역사적 화해를 강조하고 주요 현안인 베트남의 결혼이주 여성과 불법 체류자 문제에 전향적으로 접근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인과 결혼한 베트남 여성은 현재 3만9000여 명으로 중국에 이어 둘째로 많다. 그러나 배우자의 폭력이나 시집과의 갈등으로 이혼하거나 잠적한 경우가 많아 양국 간 갈등 요인이 돼왔다. 국내에 불법 체류 중인 베트남 근로자도 1만7000명이나 된다. 한국에 온 15개국 근로자 중 가장 많은 숫자다. 박 의원은 6일 베트남으로 떠나기에 앞서 중앙SUNDAY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내가 박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 수행자가 된 건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많은 사상자를 냈던 과거의 아픈 기억을 넘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자는 구상 때문일 것”이라며 “선친과 지역구(베트남 여성이 많은 부산)라는 두 개의 연결고리를 통해 (박 대통령이) 결혼이주 여성들의 쉼터 확충과 근로자 수용 확대를 논의하는 데 노력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베트남의 국부인 호찌민 묘소 방문도 박 대통령 역사 외교의 하이라이트가 될 전망이다. 박 대통령은 하노이 방문 때 바딩 광장에 있는 호찌민 묘소에 헌화할 예정이다. 1996년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베트남을 방문했던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이념적 사유’를 들어 이곳을 찾지 않았다. 98년 베트남을 찾은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묘소를 찾았지만 건강상 이유를 들어 묘소 입구에서 헌화하는 타협안을 택했다. 2004년 방문한 노무현 전 대통령 땐 첫 공식 일정으로 묘소 방문을 택했고, 유리관에 안치된 시신을 참배한 뒤 10초간 묵념했다. 반면 2009년 베트남을 국빈 방문한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묘소에 헌화하긴 했지만 화환 앞에 1~2초간 멈춰 리본을 만지며 예를 표했을 뿐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화환 형식도 다르다. 노 전 대통령은 붉은 띠에 노란 글씨로 자신의 이름을 쓴 뒤 아래쪽에 베트남어를 새긴 ‘현지식’ 화환을 선택했다. 반면 MB는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이름을 새긴 뒤 다른 쪽에 영어로 표기한 ‘한국식’ 화환을 선택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이 어떤 방식으로 헌화할지 관심이 쏠린다.

역대 대통령과 다른 과거사 언급하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베트남전쟁 파병을 결정했던 당사자였던 만큼 박 대통령은 양국 간 과거사와 관련해 뭔가 차별화된 언급을 할 가능성이 크다. YS는 과거사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DJ는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노 전 대통령은 “우리 국민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 그만큼 베트남의 성공을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MB는 “베트남이 역경을 딛고 아픈 과거를 딛고 미래를 향해 가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정부 관계자는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이고 우리와 전쟁을 했기 때문에 역대 대통령마다 정치적 성향과 지지 기반에 따라 대응 방식이 달랐다”며 “이제는 양국 관계가 성숙한 만큼 박 대통령이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취지로 절제되고 진심 어린 언급을 할 거라고 본다”고 내다봤다.

박 대통령은 역사 외교를 통해 다져진 신뢰를 바탕으로 ‘원전 세일즈’에도 나설 전망이다. 베트남 정부는 2030년까지 원전 10기를 건설할 계획인데 이 중 5, 6호기 수주가 박 대통령의 목표다. 원전 공사 수주액은 100억 달러에 달한다. 윤상직 산업통상부 장관은 “박 대통령은 그냥 (세일즈 시늉을) 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베트남에 공을 들이는 가장 큰 이유는 베트남의 정치적 중요성 때문이란 게 외교가의 중론이다. 서울의 외교 소식통은 “박 대통령이 일본을 뺀 4강 외교를 매듭지은 직후 네 번째 방문지로 베트남을 선택하고 이례적으로 닷새간 일정을 잡은 건 베트남의 핵심 거점국 위상을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중·러에 이어 한국의 세 번째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인 베트남을 확실한 ‘친구 나라’로 만들려는 포석이란 것이다.

YS의 베트남 방문을 수행했던 전직 고위 관리는 “베트남 고위 당국자들은 당시 ‘중국이 닭의 몸통이라면 한국은 부리이고, 베트남은 다리’라며 ‘부리와 다리가 힘을 합치면 몸통이 끌려온다’고 말했다. 베트남도 한국과 손잡고 중국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얘기”라며 “중국은 박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대통령의 행보엔 또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들어선 뒤 동남아에 각별한 공을 들이고 있는 일본을 견제하려는 의미도 있다. 아베 총리는 지난 1월 취임 후 첫 순방지로 베트남을 택한 이래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회원국을 잇따라 방문했다. 다음 달이면 아세안 10개국을 모두 순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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