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 현장마다 늘 보던 40~50대 중년 아저씨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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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음모’ 혐의로 구속수감된 통합진보당(통진당) 이석기 의원은 지난 5월 12일 마포구 합정동의 종교시설에서 가진 비밀모임에 참석해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운동이 상당히 고령화되었습니다…60대가 많지 않습니까…지난 당 서버 탈취 투쟁이라든가…예전에 보면 20대가 했는데, 지금은 40대, 50대가 하고 있어!” 진보 정당 중 대학생이 가장 많다는 통진당에서 이런 말이 나올 만큼 운동권은 고령화돼 있다. 이런 상황을 진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정의당, 노동당 관계자와 통진당 소식통으로부터 들어봤다.

지난달 31일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 정문 앞에서 열린 ‘현대차 2차 희망버스’ 문화제 현장. 진보 진영이 고령화 위기를 맞으면서 운동 현장에선 40대가 주축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중앙포토]

 
#발언 1=정의당 당직자 A씨는 30대 중반이지만 자기 부서의 막내다. 그는 “대부분 당직자는 40~50대이고 젊은이가 없다”고 했다. 2002년 유시민의 개혁국민정당에서 운동을 시작한 그는 “당시 개혁당의 젊은 분위기가 열린우리당으로 이어져 열린우리당엔 젊은 당직자가 많았지만 그 이후 이어진 진보 정당엔 20대 당직자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는 “희망버스 같은 현장에도 가는 사람들만 간다”며 “운동 현장에 가면 늘 보던 40~50대 아저씨들의 얼굴을 또 본다”고 말했다.

 #발언 2=노동당 당원 B씨는 민주노동당 때 중요한 당직도 맡았던 40대다. 그는 자기나 동료나 운동 열의가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낀다. 30대 때 당의 상근자였던 많은 동지들이 10년 가까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는 모습을 본다. 그는 “최근 받은 당 자료에 따르면 2000~2004년엔 당원의 70~80%가 30대였지만 지금은 70~80%가 40대”라며 “전엔 20대가 했던 일을 지금은 40대가 한다”고 했다. 희망버스 같은 현장 활동에 대해서도 “40대가 5~6시간 버스 타고 투쟁 현장에 가서 시위하는 게 체력적으로 힘들고 피곤한 일”이라고 했다. 그는 “거리 투쟁을 피하려는 분위기가 은연중 깔려 있다”며 “예전엔 새벽까지 술잔 기울이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는데 이젠 초저녁에 다 들어간다”고 했다.

 통진당 분위기는 조금 다르다. 진보 진영의 한 관계자는 “통진당의 주축인 경기동부연합은 전통적인 경기동부 출신과 학생운동조직 비율이 6대 4 정도”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이석기 의원은 ‘통진당 내 운동권의 고령화’를 언급했다.

 진보 운동과 정당에 몸을 담았던 40대 C씨는 “전엔 35세면 청년위원회 책임자 자리를 후배에게 넘겨주고 ‘위’로 올라갈 나이로 여겼지만 지금은 여전히 청년 활동가로 일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청년·학생 활동력 예전만 못해
역시 진보 정당에서 일했던 D씨는 “1980~90년대 전업 운동권이 한 학교에 수백 명이고, 90·91학번 주사파는 서울에만 1만 명이라고들 했다”며 “그러나 지금은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노동당 박은지 대변인은 “대학생이 참여하는 ‘청년위원회’ 같은 조직이 당마다 있지만 학생 당원 수도 줄고, 활동력도 예전만 못하다. 당원 중 40대 이상은 60%, 2030은 40%지만 청년이나 학생 당원의 활동력이 없어진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심지어 민주당의 30대 당직자도 “젊은 사람들의 활동이 활발하지 않아 청년 몫 최고위원도 임명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진보의 막차’를 탔다고 말하는 미디어 매체 비평지 미디어스의 한윤형 기자는 “학생 당원 선배의 권유로 입당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정당 운동에 접선한 건 우리가 마지막 세대일 것”이라고 말한다. 1983년생인 그는 2001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하자마자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곧 ‘만년 후배’ 신세가 됐다. 그는 “내가 입학하던 때 대학의 운동권 조직, 소위 학정조(학생정치조직)는 완만하지만 뚜렷이 붕괴하고 있었다. 당원 활동을 하면서도 내가 언제나 ‘막내’라고 생각했다. 19살에도 막내였지만, 22살, 23살에도 막내였다”고 자신의 책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썼다.

 운동권이 고령화로 힘들어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젊은 피가 수혈되지 않아서다. 운동권 고령화는 학생운동의 퇴조와 동전의 양면일 뿐이며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정의당 당직자 A씨는 “96년 ?연세대 한총련 사태’ 이후 학생운동의 명맥은 끊겼다. 386은 제도권으로 들어가 운동하고 일반 30대는 먹고사는 데 열중했다. 운동권 명맥이 끊겼다”고 말했다. D씨도 “2000년대 초·중반부터 이 문제가 내부적으로 대두됐다”며 “그 이전엔 100명이 입학하면 10명은 운동권, 30~40명은 지지세력이었는데 이런 구조가 파괴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모 금융사의 한 노조 간부 E씨는 “200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신입사원들의 정치 이슈 관심도는 너무 낮다”고 말했다. 이들은 정치이슈가 아닌 각 사업장의 문제, 이를테면 기업 인수합병(M&A)이나 임금협상과 같은 개인 이해관계와 관련된 사안에 관심을 집중한다고 E씨는 분석한다.

 이렇게 조직 충원이 안 될뿐더러 현재 활동가도 언제든 이탈할 수 있다. 생계 때문이다. 진보적 사회단체에서 일하는 한 30대 활동가는 “30대 중반인데 월급을 100만원도 못 받는 운동가가 부지기수”라며 “현장 운동만 하다 (생계가) 어려워 월급이 좀 나은 사회 혁신 사업을 하거나, 공공단체에 취업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보통 직장 다녔으면 돈 벌고 아이들 키우는 재미로 살았을 텐데 적절한 보상을 못 받고 있어 피로가 심하다”고 말했다. 한 진보 정당의 당직자도 “예전보다 현재 월급이 훨씬 못하다”고 말한다.

 그 결과 진보 진영은 고령화의 특징인 ‘활기 부족증’을 앓고 있다. 정의당 A씨는 “옛날처럼 전국적 규모의 집회를 하기 어렵다”고 했다. 예를 들어 촛불집회 같은 경우 중앙·지역별로 해야 하는데 지역에 젊은 사람이 없을뿐더러 그래도 강행하면 인력이 모자라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민주당·정의당·노동당 같은 데도 젊은 활동가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운동 방식, 운동권 선배의 사상을 이어갈 맥이 끊기고 사상이 공유되지 않는 상황이 됐다”고 했다.

 B씨는 “고령화에 따른 피로가 쌓여 심리적으로도 보수화된다”고 했다. 그는 “예전 같으면 이석기 사태를 놓고 무조건 ‘국정원 공작’이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의견이 반으로 갈린다”며 “생활인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노총의 상담 사례 가운데에 40대 조합원인 대기업 직원이 세입자와 벌이는 갈등도 있다”며 “이런 일이 진보 진영의 일부인 민주노총에서 벌어지는 것을 보며 이게 진보 진영 운동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의 노동법률지원센터 홈페이지엔 노동 상담코너가 있다. 6일 저녁 10시 현재 서울 지역을 누르니 1~161페이지까지 3632개 질문이 올라와 있다. 거의 다 ‘운동’과 관계없는 퇴직금, 수당, 조직 내 갈등 같은 주제로 가득한 데 대해 D씨는 “운동을 ‘진보의 지향점을 갖고 활동하는 것’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민주노총의 활동은 생활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라 진보 진영 일각에선 미래에 대한 고민도 진행 중이다. 정의당 A씨는 “이전 운동의 관성을 못 벗어 이익집단 구조로 변화되며 종교처럼 변한 조직이 통진당”이라면서 “정의당은 통진당과 달리 과거의 관성을 벗어던졌지만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다”고 말했다. D씨는 “한국 운동권이 NL·PD 이념에 매몰된 운동 방식을 바꿔 새 피를 수혈하지 않는다면 일본 공산당과 같은 미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고령화로 몰락해버린 일본 공산당의 모습을 2006년 오사카에서 목격했다. 그가 “충격적이었다”고 전하는 장면은 이렇다.

 “당시 보궐선거 기간이라 거리에서 정책 홍보가 한창이었는데 공산당 측에선 3~4명의 할아버지·할머니가 나와 활동했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고 허리마저 구부정해 70세도 넘어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유세하는 목소리도 힘이 없었고….”

일본선 할아버지 진보 정당도 등장
정의당 권태홍 사무총장은 “젊은이들이 비전을 갖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며 “80·90년대 운동권이 치열함으로 젊은이들을 끌어들였다면 이젠 다양한 민주적 이슈와 의제로 참여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전통적인 운동권 출신이 아니어도, 인권·환경문제에 관심이 있거나 국제문제에까지 넓은 시야를 가진 젊은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김형준 명지대 정치학과 교수는 새로운 세대와 시대에 맞는 생활 진보가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20대에겐 이념이라는 단어 자체가 와 닿지 않는데 진보 진영은 여전히 거대 담론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어 “지금 젊은이들은 소위 ‘포켓 밸류 보팅(Pocket Value Voting:정치적 가치보다는 유권자 개인의 호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주는 지도자를 선택)?을 한다. 과거 20대에겐 통일이 내 문제였다면 지금은 생활 정치를 필요로 한다. 20대들이 그런 진보 이념에 바탕을 둔 정책을 선호하도록 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이 진보의 고령화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안성규·홍주희·류정화 기자 ask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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