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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전25시-민족의 증언(69)|미 제24사단의 혈투(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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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괴남침에 앞장을 섰던 제105 「탱크」 사단의 전 정치장교를 전회에 이어 다시 등장시켜 미 제25사단과의 전투상황을 들어보기로 하겠다.
▲오기완씨 (당시북괴군제105「탱크」 사단정치장교대위·김일성 대학농학부졸·「모스크바」 3년 유학·북괴부수상 김의 보좌관·1963년 월남 귀순·현○○부대 근무 42)는『솔직이 말해서 당시 미국이 한국을 도우러 오리라고는 전혀 생각지않았읍니다.
더우기 「유엔」의 깃발아래 여러 나라가 몰려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지요. 그래서 우리 「탱크」 사단이 수원남방오산에서 미군지상부대와 처음 교전하고서 여간 놀라지 않았읍니다.

<북괴군 미군에 공포 느껴>
북괴군은 사령관으로부터 사병에 이르기까지 미군은 막강의 일본군을 굴복시켰다는 「이미지」 가 꽉 박혀서 아주 「무서운 상대」라는 선입감이 들어 있었습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겁부터 미리 집어먹은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선입감은 천안 전투서부터 좀 해소되긴 했읍니다. 우리는 대격전을 예상했는데 우리사단 「탱크」가 앞강서 쳐들어가자 뜻밖에 천안시가 쉽게 떨어졌읍니다. 뿐 아니라 미군대대장 등을 비롯해서 많은 포로를 잡았는데 이 돌이 보기에도 민망할 경도로 무기력해요. 그저 턱과 무릎을 덜덜 떨면서 살려만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미군포로 들을 쭉 세워놓고 북괴군사병들에게 구경을 시켰읍니다. 그리고는 정치장교들이 일장의 선동연설을 했지요.

<미군포로 앞에서 선동연설>

<저 꼴을 보라. 모택동 이가 미국은 종이호랑이 (지호) 라 말했는데 꼭 맞는 말이다.>
이래서 이때부터 북괴군의 미군에 대한 공포감은 다소 수그러졌습니다. 내가 감독하고있던 제105「탱크」사단의 제107 「탱크」연대는 40대의「탱크」를 몰아 대전으로 향해 내려갔습니다. 원래 우리연대는 후대의「탱크」로 38선을 돌파, 서울을 거쳐 남침을 계속했는데 피해는 천안까지 「탱크」5대 뿐이 었읍니다. 물론 전체「탱크」사단의 피해는 더 많았지만요. 이 무렵에 서울에 있는 북괴군전선사령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작전명령과 정보지시가 내려왔어요.

<대전에는 막강의 미제사사단과 국군이 최후의 방어선을 취하고있다. 대전만 떨어지면 「남반부」는 그만이다. 전면공격을 하면 큰 출혈이 날 것이다. 군은 총력을 기울여 대전을 포위적의 적의 마지막거점을 분쇄하라.>
이래서 사단장 등 중공군 팔노군출신이 기간을 이룬 북괴군의 정예 제4사단(사단장 이영호소장) 이 대전공격의 전면을 맡고 게105「탱크」사단은 금강을 건너 대전의 배후를 찌르기로 했지요. 그리고 역시 서울에 들어왔던 제3사단은 대전을 우회, 포위해서 측면을 치기로 했음니다. 3면 포위공격이지요.

<16자 전법으로 대전공격>
이러한 북괴군의 대전공격전략은 모택동의 소위 「16자 전법」을 활용한 것입니다. 즉 <적이 약할 때에는 과감히 공격하고 강할 물러서서 포위하는 등 소모전을 전개해서 적이 피로하고 약해졌을 때 다시 결전적인 공격을 가해서 승리를 쟁취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팔노군 출신의 북괴군지휘관들은 이 전법에 머리가 젖은 사람들인데 이런 「만만적 스타일」의 「16자 전법」이 중국대륙에서는 효과를 봤지만 한국실정에는 맞지 않았어요. 북괴군이 남침에서 크게 믿었던 중공 팔노군 출신장병 (주=조선의용군으로 중공군에 있다가 북괴군에 편입된 자들) 들의 무력하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 바로 대전공격 전에서입니다.
그리고 소위 연안파숙청의 구실도 여기서 잡게 됐구요.

<대전의 미군상황 파악 못 해>
여하튼 대전은 제3, 4사단과 우리「탱크」 사단, 이렇게 3개 사단이 공격을 담당했는데 답답하게도 대전의 미군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아요. 대전지구의 지하남로당으로부터 한 건의 제보도 없단 말 이예요. 이래서 30명의 첩보원을 피난민에 섞어서 내보냈지만 한 명도 동아오지 않아요. 기다리다못해 5명을 다시 보냈는데 안 돌아와요. 또3명을 보냈지만 영 함흥차사예요.
이래서 미군의 배치·장비·병력 등에 대해서 정보가 없는 채 <무서운 미24사단이 버티고 있다>는 전제아래 소위 「16자 전법」대로 조심조심하면서 대전공격작전을 전개한 것이지요.
이것은 뒷이야기지만 대전함락 후 김일성으로부터 군 지휘부에 불벼락이 떨어졌읍니다. 작전실패라는 겁니다.
1개 사단으로도 대전을 단시일 안에 점령할 수 있는 것을 「탱크」 사단을 비롯한 3개 사단이 동원돼서 시일만 허비했으며 미24사단 주력은 빠져나갔다는 거지요.

<사단정보책임자 등 문책>
서울의 북괴군 전선사령관 김책대장 등 군 간부들이 얼굴이 노랗게 질려서 대전으로 내려와 사단장들과 참모들을 닦아세웠어요. 결론은 <정보에 무능했고 16자 전법이 무용>이라는 것과 <제105 「탱크」 사단만으로도 쉽게 정면돌파를 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북괴군 정보 책임자인 김웅소장이 견책을 당하고 그 아래 영관급 참모들도 처벌을 받았읍니다.
그리고 대전에 투입됐던 「함흥차사」격인 정보원 38명중 11명을 찾아내서 총살을 했읍니다. 이들은 「적의 경계가 심해서 대전중심으로 잠입 못하고 근처 산에서 동정만 살폈다」는 것입니다.
어떤 자는 미군을 겁내어 샅아 갈 가망이 없다고 판단, 대전시 잠입을 아예 포기했다는 거예요. 정보원 중 꾀 많은 27명은 도망가고, 결국 순진한 놈 11명이 남아서 북괴군이 대전을 점령하니까, 좋다구나 하고 나타났다가 붙들려 축은 거지요.

<삼각지서 북괴군 전략회의>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북괴군이 저지른 전략적 과오가 몇 있지만, 서울에서 시일올 끈 것과 대전공격전에서 미24사단 전력을 과대 평가한 것은 큰 잘못이었습니다. 북괴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곧 파죽지세로 남침할 수 있었지만 주저앉아 시일올 끈 것은 그들 나름대로 복안과 기대가 있었던 것입니다.
박헌영 등은 남한에 30만의 핵심지하 남로당원들이 뭉쳐있어 북괴군이 서울만 점령하고 위세를 떨치면 남한 곳곳에서 봉기, 대한민국은 저절로 무너진다고 단정했던 것입니다. 이런 판단을 북괴수뇌가 믿었기 때문에 명색 있는 소위 「인민해방전쟁」읕 하려고 서울에서 눌러앉아 남한 곳곳에서의 「인민봉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건의 봉기도 없자 당황한 김일성은 29일 밤에 평양으로부터 서울에 와서 지금의 삼각지 우체국건물 안에서 북괴군 최고전략회의를 옅었읍니다.

<무력승리확신 한강도하>
이 회의에서 어떤 자는 남한의 봉기가 없으니 모르는 체하고 북괴군을 38선으로 되돌아가도록 하자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국군주력을 부쉈으니 무력으로도 쉽게 승리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한강도하가 결정됐옵니다.
소위 「인민해방전쟁」으로부터 「무력침공전쟁」으로 전쟁방침이 바뀌어진 것이지요. 이대목이 아주 중요합니다. 나중에 박헌영 일파의 남로당에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 씌워 숙청하게된 계기도 이때부터 싹텄으니까요.
한강도하작전에서 큰 저항은 없었습니다. 탐색부대가 국군의 저항을 받았지만 적어도 제105「탱크」사단주력이 도하할 때에는 전투다운 전투는 없었옵니다. 이렇게 제물에 침공 초의 가장 중요한 며칠읕 서울에서 허송한 북괴는 한강이남에 대해 「무력남침」을 하더라도 미군참전은 없으리라고 판단했는데 결과는 정 반대였지요. 그래서 오산부터 진격속도가 처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안보리 유엔군사 설치결의>
오기완씨가 증언한바와 같이 승승장구하던 북괴군이 미 지상군의 출현으로 큰 공포에 사로잡힌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미군과의 전초전이 오산·평택·천안·조치원이었으며 본격 적인 대전이대전시공방전이었다. 이 전투를 통하여 북괴군은 미군도 「별게 아니다」 라는 자신을 얻은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이 「자신」이 그들의 패배를 초래했지만….
북괴가 미 지상군의 참전으로 한참 공포에 떨고있는 무렵에 「유엔」에서는 또 하나의 중요조치가 취해졌다.
7월7일에 「유엔」안보리사회의에서 6월25일과 27일의 결의에 따라서 병력을 제공하는 제국에 대해 미국의 통솔 하에 연합군사령부를 설치하도록 권고하고 미국에「유엔」군 최고사령관을 임명하도록 요청했다.
「유엔」 안보리사회에서의 이 결의안은 7대령 기권3 (인도, 유고, 아랍 공) 으로 가결되었다. 한국참전국은 미국뿐 아니라 전「유엔」회원국으로 늘어난 것이다. 이로써 물론 주력은 미군이지만 한국을 돕는 외국군은 처음으로 「유엔」군이란 공식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세계의 관군」 이란 비단 깃발을 달게된 것이다.
「유엔」 군 총사령관에는 의당 「더글러스·맥아더」 원수가 임명되어 한국참전외국군은 「유엔」 군이란 호칭을 갖게 됐다. 그러나 「맥아더」 원수는 「유엔」 군 총사령관에 임명되기 약2주일 전부터 이미 미군사령관으로서 한국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7월7일의 「유엔」 안보리결의는 미국입장에 대한 「유엔」의 또 하나의 「추인」 이지만 미군 단독 아닌 「세계의 관군」 이란 명칭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컸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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