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적 범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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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최근에는 우리 주변에서도 프로이트 심리적인 범죄가 자주 일어나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지그문트·프로이트」는 심적 결정론을 주장한바 있다.
심적 결정론이란 어떤 사건이든 그에 선행하는 사건의 필연적 결과라고 보는 입장이다. 따라서 정신현상은 언제나 무슨 원인이 있어서 얼어난다고「프로이트」는 생각한다. 이런 경우 우연이나 자유의지는 설득력이 없다. 모든 행동은 반드시 선행하는 동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문제는 그 동기가 의식되느냐, 안 되느냐는 차이이다. 의식되지 않을 때는 무의식적 동기라도 있다. 그 무의식적 동기는 항상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기회만 있으면 의식 바깥으로 뛰쳐나오려고 한다. 이 때에 사람은 불안감·죄악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의식적 자아는 그것과 맞서서 부단히 싸우고 있다. 이른바 억압의 심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무의식적 동기가 한할 경우가 있다. 그때에는 야외의 일이 벌어진다. 애정을 품어야 할 사람에게 총부리를 대거나, 미운 전실 자식을 과장해서 예뻐하게 되는 등-.
공격심리도 이런 과정에서 움튼 것이다. 무의식적 동기가 난동을 부리게 되면, 그 일은 걷잡을 수 없다.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난데없이 연발 총소리가 들렸다. 교정엔 잠깐 사이에 총상자가 여기 저기 쓰러졌다. 죽은 학생도 있었다.
이 가해자는 못 밖에 행복한 가정의 출신이었다. 웬일인가. 문제는 그 무의미하고 지루한 행복에 있었다. 대화가 끊어진 아버지 자신의 일에만 집착한 어머니, 그리고 때때로 일어 나는 부모의 불가 은의 한 무관심. 그들의 행복은 위장이며 껍질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과거는 복잡했다. 고심 참담한 자수성가, 그리고 여자 관계…. 그 청년은 자신의 가면쓴 행복에 총질을 하고 싶었다.
작금 세인을 아연케 하고 있는 양구 사건도 윤리적으로는 그 범죄의 원인을 설명할 수 없다. 범인 자신도 어쩌면 그 동기를 전연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횡설수설한다.『다만 반항하고 싶을 뿐』이라는 지극히 관념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카뮈(불 작가)의『반항적 인간』에 의하면 반항은 니힐리즘에서 비롯된다. 인간조건의 허망에 대한, 아니면 사회적·정치적 허망에 대한, 아니면 비정에 대한 반항-.
양구의 청년은「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적 동기에 의해서 총을 들고, 다방을 점거하고 그에게 접근한 자를 살해하며 카뮈적인 반항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범죄를 바라보는 심정은 우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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