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J] 스타PD '나영석', "난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사람"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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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석은 지금 가장 유능한 예능 지휘자다. '꽃보다 할배'는 보란 듯 성공했고, 시청률은 10%를 돌파했지만 그는 여전히 아웃사이더적 면모가 너무 많은 인물이다. 그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경계선 위에 서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나영석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머리는 부스스했고, 눈은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그는 당일 방송할 '꽃보다 할배'를 편집하던 중이었다.

- 스타 PD가 너무 힘들게 사는 거 아닌가?

"아이고, 왜 이러나. 일 없다. (젠틀맨 과월호를 보며) 이 요트 좋네. 열심히 하면 언젠가 이런 배 살 수 있을까?"

- 나는 힘들 것 같지만, 당신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아마 못 살 거다. 이거 못 사는 건 당신이나 나나 똑같다. 하하."

- 사무실 안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고 들었다. ‘5% 5개, 3% 3개, 100억 달성.’

"하하. 사실이긴 하다. 공중파에 있을 때는 그런 노골적인 문구가 대놓고 걸려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게 깔끔한 것도 있다. 왜 칭찬받고, 왜 싫은 소리를 듣는지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니까. 모호하게 말하면 피곤한 것도 있거든. 방송도 예술하는 양 하지만 사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잖나."

- '꽃보다 할배'가 수도권에서는 사실상 10%를 넘었다. CJ 내에서도 굉장히 고무적이겠다.

"사실 조사하는 곳마다 수치가 다르다. 시청률 내는 기준이 엄청나게 많더라고. 나도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사실상 전국 5% 정도의 시청률로 보는 게 가장 정확할 것 같다. 체감되는 인기는 잘 모르겠다. '1박2일'이 정말 잘나갈 때와 비교해보면 그만큼은 아닌 것 같다."

- 칭찬받으면 부끄럽나?

"그렇다. 익숙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일만 하는 사람들이라 누가 갑자기 좋은 얘기하면 ‘나한테 무슨 해코지를 하려고 저러나’ 싶어 불편하기까지 하다. 시청자들이 프로그램을 좋아해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우리는 말하자면 일개미 같은 직종이다(웃음). 인기에 도취되거나 할 틈이 없다."

- '꽃보다 할배'는 나영석 개인으로도 중요한 프로그램이었다. 원 히트 원더가 아니라 꾸준히 히트작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입증했다.

"이름이 안 알려진 PD는 아니니까, 망하면 창피할 것 같긴 했다. 나도 모르게 명성에 도취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프로그램 하나 망할 수도 있는 건데, 어느 순간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게 되긴 하더라. ‘나영석 알고 보니까 허당이네’ 이런 말 듣기 싫었던 것 같다.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더라고."

- 아이템이 수없이 많았을 텐데, 왜 하필 어르신들 모시는 프로그램을 주연으로 내세웠나? 케이블에서 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커 보였다.

"CJ처럼 스타일리시하고 젊은 층에 코드를 맞추려는 채널에서는 확실히 리스크가 컸던 것도 사실이다. 다행히 기획을 반려당하지는 않았다. 이적 후 처음 하는 프로그램이니까 다들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하는 분위기이기는 했다. 하지만 뭔가 개운치 않은 눈빛은 확실히 느꼈다(웃음). 하지만 채널의 특성을 떠나 좋은 프로그램은 어떻게든 사람들이 본다. '1박2일' 하면서 그런 믿음을 얻었기 때문에 밀어붙이고 싶었다."

- '꽃보다 할배'는 특정 계층이 아니라 전 연령층에 어필하는 프로그램이다. 기획 단계부터의 생각이었나?

"사실 예능 만드는 사람들은 무조건 20~30대 여성 시청자를 먼저 생각한다. 거기서 입소문이 나면 남자로, 아이들로, 어르신들로 넘어간다. 나도 그 기준으로 생각했다. 어르신들이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 젊은 여성 시청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분들은 위대한 배우, 그냥 나이 든 할아버지, 우주에서 떨어진 외계인 같은 면도 있는 분들이니까. 귀엽게 보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이 프로그램에는 강호동처럼 믿고 맡길 수 있는 톱 MC가 없다.

"어찌 될 줄 모르는 상황을 좋아하고 즐기는 것 같다. 톱 MC가 함께 했다면 그가 상황을 만들고, 웃음을 만들고, 의미를 뽑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어르신들이 피동적으로 보이는 게 싫었다. 어르신들이 스스로 연구하고 판단해서 사건이나 모험을 만들어내기를 바랐거든. 이분들을 무조건 전면에 내세워야 뭐가 돼도 될 것 같았다."

- 즉흥적인 면이 있나 보다.

"기본적으로 모범생 스타일인데, 나도 모르게 흥분하는 경우가 있다. 뭔가에 꽂히면 거기 확 휩쓸려가버린다. 인생에 그런 포인트가 한 번씩 있었다. 사실 사는 게 얼마나 심심한가. 방송에서라도 그런 의외성을 좀 보여줘야 사람들이 재밌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스스로도 그런 예상 불가능한 프로그램을 만들 때 가장 재미있다. 혼자 뒤에서 마음 졸이며 볼 때가 가장 흥분되는 시간이기도 하거든."

- 여행이라는 테마를 계속 다루고 있다. 여행을 좋아하나?

"여행을 좋아하기는커녕 나다니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여행으로 재미를 봤고,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기획을 낼 때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훌륭한 PD가 못 되는 거다. 나도 '1박2일'과 전혀 다른 프로그램을 해서 반전을 주고 싶었는데, 안 되더라(웃음). 수많은 기획안 중에 이 프로그램이 계속 눈에 밟혔다."

- 당신도 그렇지만 요즘 이슈가 되는 케이블과 종편의 몇몇 프로그램은 공중파에서 옮긴 PD들의 작품이다. 공중파라는 조직이 PD들의 기량을 못 따라간 걸까?

"공중파 예능국에서 10년 이상 핵심 프로그램을 만들고 경험한 사람들은, 말하자면 무서운 살인 병기다(웃음). 이 살인 병기들이 칼을 어디다 찔러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었던 거다. 그들이 유능한 PD라고 해도 조직에서 보기에는 단위 세포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 느끼는 답답함이 분명 있었을 거다. 성과에 대한 회의, 창작에 대한 보이지 않는 간섭 등등. 다들 생각이 많았겠지."

- 금전적인 보상 문제도 꽤 컸을 테고.

"포장하고 싶지 않다. 돈 문제도 있지, 왜 없겠나. 하지만 사람이 돈만으로 움직이는 건 아니다. 특히 이런 직종은 더 그렇다. 내 또래에 이직하는 사람들의 꿈은 비슷할 거다. 더 시간이 지나기 전에 자기가 익힌 기술을 써먹어보는 것. 내가 적을 다 벨 수 있는데 이쪽에서는 칼도 못 만들게 한다. 저쪽에 가면 칼도 주고 맘대로 휘두를 자유도 준다고 한다. 어떤 걸 택하겠나."

- 당신이 CJ로 옮기게 된 결정적 계기는 뭐였나?

"나 역시 KBS를 떠날 때 정든 고향 떠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CJ에 먼저 와 있는 선후배들이 다들 나와 너무 친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일하던 시스템이 그대로 이곳에 정착해 있었다. 그 시스템 안에서 함께 일하고 싶었다."

- 촬영장과 편집실에서만 생활하다 보면 가정은 어떻게 돌보나?

"아쉽고 미안하다. 특히 유치원 들어간 딸에게. 아내는 내 생활을 이해해주는 면이 있지만 애들은 그걸 모르잖나. 태어나서 3년 동안은 딸이 날 바라보는 얼굴이 굉장히 무표정했다. 출근할 때 “아빠 다녀올게” 해도 구석에 앉아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럼 하루 종일 그 표정이 생각났다. ‘내가 뭐 하자고 이러고 있는 건가’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

- 그렇게 일만 하다 나중에는 뭐가 남을지 생각해보면 좀 두렵지 않나?

"일단 내 생업이니까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그리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딸이 컸을 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내가 직접 계산해봤는데 딸이 중학생쯤 되면 아빠가 하는 일을 이해하고 자랑스러워할 수 있겠더라. 그러니까 내가 대략 10년 정도만 지금의 기량과 퍼포먼스를 유지하면 훌륭한 아빠가 될 수 있는 건데(웃음). 유지가 안 될 것 같긴 하다."

- 많은 남자들이 인생 2막을 꿈꾼다. 당신도 방송이 아닌 다른 인생을 꿈꾸나?

"그런 생각 엄청 많이 했다. 하지만 그게 바람 들듯 한 번씩 왔다가 막상 일하면 또 사라지더라. 이제까지 한두 번 고비가 있었는데, 주기를 생각해보면 40대 초·중반에 또 한 번 고비가 찾아올 거다. 그 유혹이 제일 클 것 같긴 하다. 그걸 견디면 이 바닥에서 계속 가는 거고, 아니면 내 인생이 또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거지(웃음)."

- 아무래도 조직 지향적 인물은 아니다.

"이런 말 하면 회사 윗분들이 싫어하실 텐데…. 내가 조직 지향이 아닌 건 맞다. 그렇다고 조직에서 도드라지거나 반하는 인물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런 애들 보면 가서 한마디 하는 타입이지. 나 자신이 조직에서 잘나가길 원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마음 붙이고 있는 조직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무너지는 걸 원하지도 않는다. 딱 그 정도다. 한 발은 들어 있고, 한 발은 나가 있는."

- 그 밸런스를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없는 걸 갈망하고 부러워하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모범생이고 평범한 사람이라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부분이 뛰어난 사람들이 늘 부러웠다. 대학 시절 연극반에 확 빠져든 것도 그런 사람들이 많아서였다. 예컨대 일부러 흙밭에 들어가서 몸에 막 흙을 묻히는 거다. 그래야 내 몸 안에 산성과 알칼리성의 밸런스가 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 늘 그런 밸런스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한쪽으로 너무 치우쳤다 싶으면 억지로라도 반대쪽으로 가려고 노력하게 되더라고. 회사 생활도 비슷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메이저를 좀 싫어하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조직에는 마냥 충성하는 사람부터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까지 수많은 사람이 있고 그런 이들이 모여 굳건한 하나의 틀이 된다. 나는 그 틀이 무너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거기에 빠져들거나 섞여 들어가는 것도 싫다. 생각해보면 늘 어느 쪽도 아닌 애매한 지점에서 서성였던 것 같다. 늘 줄타기하는 심정으로 산다. 줄 밖으로 벗어날 것 같으면 놀라서 다시 줄 위로 올라가고."

- 방송은 거대하고 화려한 미디어다. 당신은 영향력 있는 PD다. 그다음에는 뭐가 있을까?

"여기서 열심히 헤엄쳐서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내가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보는 걸 즐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이 내게 굉장히 좋은 흐름인 것 같긴 하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론칭했고, 이게 끝나면 또 어딘가로 흘러갈 거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 이 미디어라는 환경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내 가슴속에 빛나는 무언가가 꺼지지 않게 잘 유지해나갔으면 한다."

글 이기원 젠틀맨 에디터
사진 윤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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