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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지위의 향상|황신덕 여사에게 듣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이게 조국의 마지막이라면 2천만 동포가 모두 태평양 물 속에 빠져죽고 싶을 만큼 비참하던 나날이었지요. 그러다 해방이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겠읍니까. 우리말 우리 글을 다시 찾자는 향학열이 폭발적으로 퍼져 문교부장관이 인원제한도 하지 맡고 연령제한도 하지 말고 그저 배우겠다는 사람 다 받아들여 가르치라고 지시할 정도였으니까요. 학교는 부족했고 자연히 전인교육에까지 힙이 미치지 못했어요.』 이미 해방 전에 경성가겅여숙을 창설하고 여성교육의 길에 나섰던 황신덕씨(72·중앙여자중·고교재단이사장)는 교육열의 내력을 말한다.
정부수립 4년 후인 52년에는 이미 3전9백43명 (남2만8전4백29명)의 여성들이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대학을 졸업한 여성이 3백16명 (남3천6백81명) 이나 되었다. 여성에 대한 교육열은 계속 증가, 10년 후인 62년에는 여대생이 3만4천9백33명(남11만7천7백11명)대학을 졸업한 여성이 4만1천35명 (남24만3천3백82명)으로 늘어났다. 이 10년 동안의 증가율은 남자가 11배인데 비해 여자는 18배나 된다.
『교육은 인습의 굴레에서 얽매여 살던 여성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주었고 이 자각은 국가발전에 자신이 참여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갖게 했습니다. 우선 눈에 띄는 현상으로 여성의 사회진출을 들 수 있겠지요.』 황 여사는 51년 4만8천5백명 정도이던 여성취업인구가 20년 동안 3백70만으로 60배 이상 증가, 전 취업인구의 36%를 차지하는 거대한 「파워」를 이룩한 현실을 교육의 두드러진 공로로 꼽는다.
그러나 이 줄기찬 교육열과 사회진출을 여성의 내면생활에 얼마나 큰 지식인다운 혁명을 일으킨 것일까. 1930년대에 「시대일보」와 잡지「신가정」기자로 일했던 황 여사는 『그 당시 여성난은 여성들에게 문자계몽, 자주독립사상계몽, 부엌개선 등 원시적 생활계몽에 치중했었는데 40년이 지난 오늘날의 신문들이 역시 「부엌개량」 기사를 다루고있으니 답답하지요』라고 말했다. 『대대로 여자의 팔자에 대한 숙명론을 배워온 우리 나라 여성들의 의식구조를 단시일의 교육으로 개조하기 힘들었다는 단적인 예가 이 부엌개량문제라고 봅니다. 거기다 숭늉 한 그릇 뜨러 가는데 문지방을 서넛씩 오르내려야 하는 가옥구조를 남성들이 전혀 개량해주지 않았구요.』 황 여사는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는 원칙대로 여성들이 정치·경제·문화 각 부문에 활발하게 진출, 여성을 위한 창의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문제에서는 특히 「리더」가 중요합니다. 일제시대나 해방직후에는 여성단체들의 활동 목표가 뚜렷했던 만큼 여성운동이 강력하고 활발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여건이 다르지요. 경제안정과 가족계획 실시로 여가를 얻게 된 여성들이 뚜렷한 공동목포 없이 산재해 있으니까요.
요즘 여성단체들이 여가선용을 위한 취미활동을 아내하고 사회활동의 길을 트는 등 다 잘하고 있는 줌입니다만 노파심에서 한마디한다면 원시적인 안목이 좀 부족하지 않나 싶어요. 여가선용이라도 멀리 보면 국가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것, 우리형편에 알맞는 것, 그리고 국제적인 유대강화보다 농촌여성들과의 유대강화에 눈 돌리는 것이 필요하지요.』 해방의 감격이 무엇인가를 경험했던 여성들은 다 어머니가 되었고 그들의 자녀가 다시 성년이 되었다. 지난날 삼·일운동의 독립투사였던 황 여사는 『역사를 잊지 말라』고 어머니와 자녀들에게 당부한다.
특히 새 세대에게는 『조상들의 못난 것을 답습하라는 것은 아니나 조상이 당한 고난을 이해하고 그 고난 끝에 이룬 오늘을 올바로 지켜 가는 『정신을 갖기를』 당부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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