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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 뒤엔 다국적 작곡가 … 200곡 만들면 한 곡 살아남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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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K팝 제작소가 진화하고 있다. 외국의 유수 작곡가들이 한국으로 찾아와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SM에서 협업 중인 작곡가들. 왼쪽부터 루드빅 린델·맥스(본명 송서호)· 올로프 린드스코그·앤드류 최, 헤일리 에이트큰·대니얼 시저·김태성·안성찬.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덥(DUP) 비트를 만들어주세요. 댄서블(Danceable), 유니크(Unique), 파워풀(Powerful)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지난달 29일 서울 청담동 SM청담스튜디오 3층. 스웨덴과 호주, 한국의 작곡가들 앞에서 이 회사 A&R(Artists & Repertoire·아티스트와 그 곡 목록을 만들어주는 일) 팀 조한나씨가 파워포인트를 넘겨가며 영어로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남성그룹 슈퍼주니어나 엑소(EXO)에게 어울릴 만한 노래를 짓는 게 이날의 미션.

조씨는 “복잡하되 따라 부르기 쉬운 멜로디”를 요구했다. “스타일이나 템포(빠르기) 등엔 제한이 없습니다. 이전엔 들은 적 없는 음악, 바로 당신들의 음악이 다른 이에게 참고가 되도록 만드는 겁니다!”

 수다를 떨던 작곡가들은 커피 한 잔씩 뽑아 들고 작업실로 향했다. 3번 방엔 스웨덴에서 온 남성 3인조 작곡팀 D3O(디트리오)와 한국의 가수 겸 작곡가 앤드류 최가 짝을 지어 들어갔다. D3O가 만든 반주에 앤드류 최가 쓴 멜로디를 붙이며 곡을 수정해갔다.

 반대편 5번 방엔 호주 출신 여성 작곡가 헤일리와 한국의 작곡가 맥스(송서호), 안성찬씨가 함께 곡을 다듬었다. 작업이 얼마간 진행되자 헤일리는 녹음실에 들어가 영어 가사로 노래를 불렀다. 곧장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중독성 있는 멜로디였다.

 SM 프로듀싱실 이성수 실장은 “이런 조합 속에서 헤일리가 혼자 스웨덴에서 만드는 것과는 다른 곡이 나온다. 좋다 나쁘다를 떠나 일단 달라야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다. 어떤 땐 너무 달라 대중에게 무시당하기도 하지만, 제대로 맞아 떨어지면 신선한 곡이라며 환영받는다”고 했다.

K팝 제작소가 진화하고 있다. 외국의 유수 작곡가들이 한국으로 찾아와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SM에서 협업 중인 작곡가들. 왼쪽부터 루드빅 린델·맥스(본명 송서호)· 올로프 린드스코그·앤드류 최, 헤일리 에이트큰·대니얼 시저·김태성·안성찬.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세계로 뻗는K팝. 그 뒤에는 지구촌 작곡가들의 협업이 있다. K팝의 공감대를 확대하려는 뜻에서다. 그만큼 산업적 기반도 단단해졌다는 증거다. SM에도 유영진·켄지·지누(히치하이커) 등의 전속 작곡가가 있다. 하지만 이들 같은 전천후 작곡가를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SM은 1990년대 후반부터 외국 작곡가와 연결망을 만들어왔다. 세계시장에서 음악적 보편성을 얻는 방법이다. SM의 발걸음은 여타 K팝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효리의 ‘배드걸’, 심지어 조용필의 ‘바운스’도 외국 작곡가에게 의뢰한 곡이었다.

 그 사이 SM의 협업방식은 진화돼왔다. 한국의 작곡가를 해외에 파견하기도 하고, 화상 원격회의를 통해 전세계 작곡가들과 대화하기도 했다. 지난달엔 방 5개짜리 송 캠프(Song Camp) 전용 스튜디오 공사를 마쳤다. 외국 작곡가들이 아예 한국에 와서 2주일간 머물며 다른 팀과 협업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성수 실장은 “트랙 가이(반주), 탑 라이너(멜로디), 리릭시스트(작사) 등 각자 강한 분야가 있다. 3~5인이 한 팀으로 조합해 시너지를 낸다”고 설명했다. 그 조합은 A&R부서의 몫이다. 외국 작곡가가 트랙에 강한 팀이면 멜로디가 강한 한국 작곡가를 붙이고, 멜로디에 강한 팀이면 그 반대로 하는 식이다.

 그 조합은 1주일 단위로 바꾼다. 단순히 외국 작곡가의 곡을 돈 주고 사 오는 게 아니라 시작 단계부터 계획을 세워 아티스트와 SM 퍼포먼스에 맞춰 프로듀싱하는 것. 이는 SM의 CT(문화기술·Culture Technology)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 실장은 “외국 작곡가의 곡을 받는 건 좋지만 한국적 정서를 이해하는 부분에선 한국 작곡가를 넘을 수 없다. 음악적으로 좋은 부분과 한국적 정서를 잘 조화시키기 위해 만든 게 이 공간”이라고 말했다.

 올해 히트한 엑소 ‘늑대와 미녀’가 SM 전속 작곡가 켄지가 스웨덴·영국 작곡가와 함께 지난해 한국에서 만나 공동 작곡한 첫 사례였다. 시스템이 완성된 만큼 앞으로 제 2의 ‘늑대와 미녀’가 쏟아질 예정이다.

 이런 결합으로 한 곡을 뽑아내는 데 하루나 이틀쯤 걸린다. 한 팀이 2주간 5~10곡쯤 만들어내는 셈이다. 전세계에서 SM으로 쏟아지는 곡은 1주일에 150~200곡. 그 중 채택되는 건 많아야 1곡이다. 이후에도 A&R팀이 프로듀서와 아티스트 의견을 수렴해 곡을 수정하는 등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나의 곡이 완성된다. 채택될 확률이 극히 낮음에도 외국 작곡가들은 비행기삯을 부담하고 한국까지 온다. K팝의 시장성이 그만큼 높다는 증거다. 가령 6월 초 나온 엑소 1집 ‘XOXO’는 리패키지 앨범을 포함해 발매 석 달 만에 70만 장이 팔렸다.

 헤일리는 “SM이 원하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 알게 되고 곡을 만들면 즉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으니 좋다. 한국시장과 한국인의 취향, 정서까지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돼 행복하다”고 말했다.

 아이코닉사운즈 김태성 대표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협업을 많이 해봤지만 이 같은 체제를 갖춘 건 SM이 유일하다. 이젠 음악도 영화처럼 자본과 인력, 시스템이 만나는 문화산업으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글=이경희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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