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진우의 저구마을 편지] 그러나 꽃은 피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지난 가을 김장에 쓰려고 배추와 무씨를 뿌렸습니다. 모자란 거 같아서 열흘쯤 뒤에 배추와 무씨를 더 뿌렸지요. 앞에 뿌린 배추와 무는 제대로 자라 김장에 쓸 수 있었지만 뒤에 뿌린 것들은 예년보다 일찍 찾아든 추위에 성장을 멈추었습니다.

김장 후, 밭에 듬성듬성 남은 배추와 무를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못난 사람 만나 고생하는 거 같아서요. 겨우내 얼고 녹기를 거듭하면서 버틴 그것들이 요즘 줄기를 내밀려고 합니다. 줄기를 밀어 올려 꽃을 피우겠지요. 마을에서는 배추나 무에 줄기가 나면 먹지 못한다며 잘라버립니다. 씨를 받아봤자 제대로 된 배추나 무가 되지 않는다지요. 배추꽃, 무꽃 보기 힘들어진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샛노란 배추꽃과 하얀 무꽃. 보기만 하여도 풍성해지는 그 꽃을 게을렀던 탓에 원도 없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들은 그것들대로 한살이를 끝내고 이 사람은 이 사람대로 호사를 누리게 된 거지요. 추위와 게으름, 그 악재가 도리어 기쁨을 주는 호재가 되었습니다. 배추꽃, 무꽃과 함께 나비와 벌이 날아올 겁니다. 저만치서 머뭇거리기만 하는 봄이 야속합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