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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의 형세 (16)|「6·25」20주…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 전쟁 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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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25전의 국군의 정신 자세에 대해 몇 사람의 조언을 더 들어보기로 하겠다.
▲김형일씨 (당시 정일권이 삼군 총 참모장의 비서실장 겸 특별 보좌관·중령·현 국회의원·신민·48) 『6·25전에 장교들 사이에 「댄스·파티」가 유행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서울에 있던 장교들의 이야기입니다. 지방의 장교는 그렇지 않았지요.
그때의 일부 장교들이 부패했다 운운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부패의 범주 속에 넣을 수 없는 정도였지요. 대부분의 장병들간에는 일본식의 엄한 군기가 있어서 퍽 소박한 자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50년에 들어서는 38선에는 남북을 왕래하는 장사꾼들이 많았는데 군 정보 기관에서 이들을 조종해 북의 정보를 얻으려고 했지요. 군의 고급 지휘관이 사복을 채우려는 수단은 아니었습니다. 정말 군의 부패 문제를 거론하려면 54년 휴전 이후부터 따져야지요.

<사병들의 정신 무장은 훌륭>
한편 공산 여순 사건 후의 숙군으로 군내의 공산 및 용공 분자들은 뿌리가 뽑혀서 반란은 없었습니다. 특히 사병들의 정신 무장은 훌륭했다고 봅니다. 내가 7월 초순께 대전에 가서 총 참모장의 명령으로 병원을 점검했는데 6만 여명으로 집계가 나왔습니다. 3만5천 여명이 전사 혹은 실종한 것이지요.
집계된 6만명 중에는 적지에 갇혔다가 탈출해 온 장병들도 많았습니다.
또한 계속 후퇴 명령을 내리니까 분개한 나머지 카빈을 맞대고 자결한 장병도 많았고요. 이런 강렬한 일은 내가 안 것만도 삼백건이나 됩니다.』 한편 남북 교역, 즉 속칭 「북어 사건」에 대해 한 사건 당사자는 다른 증인들과는 달리, 이를 맹렬히 비판하고 있다.
▲김석원씨 (북어 사건 때 제1사단장·현 성남 고교 이사장·77) 『내가 1사단장으로 있던 1949년 상반기까지의 북괴군 장비는 우리 국군에 비해 그다지 우세하지는 못 했어요. 그들은 남침 전 1년 동안에 소련으로부터 장비를 대거 들여온 거지요. 소위 남북 교역은 1947년 5월 미군정과 소련군 정 당국과의 합의에 따라 남북간 얼마간의 물물교환이 결정되어 정부 수립 1년 후까지 약 2년 동안 계속 됐지요.

<「남」이 밑지는 남북 교역>
그런데 내가 49년1월에 1사단장에 취임해서 가만히 보니까, 이번에서는 주로 미제 약품·타이어·전선 같은 군수품이 넘어가는데 저편에서는 해산물·카바이드 같은 것이 온단 말이 예요. 하여간 그때 토성에는 북어가 산더미같이 싸였어요. 군 일부에서는 적정 탐지기를 위해 이런 장사를 이용한다고 하지만 이쪽이 훨씬 밑지는 장사란 말이 예요. 그리고 장사 자금 일부가 남로당으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도 있고 해서 사단장 명령으로 반출을 금지 시켰습니다. 그때 송악산 전투에 3백여명의 인부를 쓰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압류한 북어를 다 나누어주었지요. 군 부식과 군 병원에도 쓰고요. 그랬더니 육본에서는 l사단장이 장사 물자를 마음대로 압류 처리한다고 야단이 났어요. 명륜동 내 집에 정보원을 배치시켜 놓고 혹시 부정이 있나 하고 내 뒤를 캐고요.
그러나 나는 압류 물자와 처리 과정은 일일이 참모 총장에게 보고했거든요. 급기야는 이 대통령께까지 보고가 되어 신 국방, 채 총장, 나 셋이 경무대에 불려 갔습니다. 대통령께서는 「나라 지키는 사람들이 싸움만 하면 되냐」하고 질책했어요.

<채 총장 예편됐다 현역 복귀>
나는 큰소리로 「각하, 나라 지키는 군 지휘관들이 적과 장사해서 돈벌이 할 수 있습니까?」하고 여쭈었지요. 그때 대통령께서 격노해서 손을 부들부들 떨던 것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신 장관이 급히 일어나더니 「각하, 제가 알아서 선처하겠습니다」하고 그 자리를 얼버무렸지요. 그후 며칠 안 있다가 49년l0월에 나와 채 총장이 다 함께 군복을 벗었는데 채 총장은 두 달이 지나니까 또 군복을 입더군요.
내가 지금도 6·25와 관련해서 당시 군 지휘부 처사에 납득이 안 가는 점은 ①방위 진지건설 건의를 묵살한 것 ②6월10일에 군 수뇌·사단장의 대 인사 이동을 한 것 ③6·25 3일전에 그 동안 계속된 비상 경계를 해제 한 것 ④6·25 몇일 전에 3분의1 병력에 휴가를 준 것 ⑤한달 전에 각 연대에 4문씩 있던 대전차포를 수리 차 거둬들인 것 ⑥24일 밤의 육본 회관 개관 파티와 그 뒤에 있던 심야 파티 등입니다. 그러나 이 해답의 진짜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작고했으니, 이 수수께끼는 영영 못 풀릴지도 모르지요.』

<의혹 조사 못하고 남침 맞아>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이인씨 (73)도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주목할 만한 증언을 하고 있다.
『6·25가 나서 대전으로 피난 갈 때 신흥우씨를 만났습니다. 그는 이 대통령으로부터 국방부와 군 고위층의 일부 인사가 좀 이상한 것 같으니, 조사해 보라는 분부를 받고, 미처 조사해 볼 사이도 없이 큰 일을 당했다고 말하더군요. 6·25 얼마 전부터 이 대통령이 일부 군 고위 간부들에게 무엇인가 의심을 품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사관 학교장 이준직 준장을 만났더니 자기가 사단장으로 있을 때 의정부 북쪽의 전국의 괴뢰군 동향이 심상치 않아 6·25 한달 전부터 5회에 걸쳐 국방부·참모부·미 군사 고문단에 각각 남침 주의보를 냈지만 전부 묵살 됐다고 불평합디다.』

<적 백 22㎜ 포 보유 안 믿어>
당시 2사단장이었던 이형근 준장 (현 행정 정위 조사 위장·50)도 김석원씨가 지적한 의아 점에 대체로 동조하고 있다. 『6월10일에 사단장 급을 비롯한 군 지휘관 급의 대이동이 있었는데 그때 제1, 제3, 제5 사단 이외의 5개 사단장 전부가 바꾸었습니다. 물론 채 총장이 4월10일에 참모 총장에 재 취임해서 그가 구상한 인사였지만, 하필이면 적이 심상치 않은데 왜 그런 대이동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신임 사단장들은 취임 15일 만에 적침을 당했으며, 제대로 부대 실정도 파악 못 한 채 적과 싸우게 된 거지요.
또 한가지 이상한 것은 남침 전 해의 일인데 당시 38선에 침투한 북괴군이 1백22㎜ 곡사포를 사용하고 있다고 현지 지휘관이 육본에 보고했으나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1백22㎜ 불발탄 실물을 보냈는데도 반응이 없었다는 거예요.

<의문점은 "우연의 일치다">
그리고 전투 경험이 부족한 아군을 소수 부대식, 그것도 야간에 「대차 투입」한 것도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 밖에도 비상 경계의 해제, 정보국에서 상신한 적정 정보 무시, 6·25 전야의 심야 파티 등 납득이 안가는 일들이 많지요.』
그러나 일부 인사들은 이런 의아심은 당시 군 지휘권 핵심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확대 상상에서 나온 것이며 사실은 우연의 일치로 재난이 겹치게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장병 휴가는 농한기에는 의례 있는 일이며 차량과 장비 횟수는 노후 장비를 정비하기 위한 것이며 비상 경계 해제는 그 동안의 장기 경계 태세에서 오는 만성적 타성을 정정하려고 한 것이며 육본 회관 파티는 그때 사회 풍조의 한 단면이었다고 해명하고 있다. 요는 일이 잘 되면 아무 문제도 안될 것이, 안 되니까 선의의 처사도 의심을 받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정보비의 대폭 삭감이 적의 전면 남침을 예견 못한 원인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보비 대폭 삭감도 실책>
황관수·조규동 공저 『한국의 동난』을 보면 1950년4월부터는 군 정보비가 3분의1로 깎여서 불과 기 백만원 밖에 안되었는데 이때의 북괴군 정보비는 1억 수천만원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저서는 중립을 가진 이편 첩자를 북한에 배치할 수 있었다면 좀더 적극적인 대비책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또한 적의 주정로로 예상되는 의정부 방면의 제7사단에 예비 연대로 배속된 대전 제2사단의 제25연대를 기일 내에 이동시키지 못 한 것도 큰 실책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밖에 전방 지휘관의 실책으로서는 적에게 탱크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주 저항선 전방에 대전차 호를 공병들이 왜 구축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도 제기 되고 있다.
이상은 결과적으로 미루어 볼 때 6·25전에 주로 군 지휘 층이 저지른 과오와 실책들이었다.
이번 16회로써 『남과 북의 형세』는 끝을 맺는다. 제목 그대로, 6·25 이전의 대한민국과 북괴의 형세를 여러모로 비교 부각시켜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북괴가 8·15 해방 후부터 소련의 직접 원조와 감독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중공까지 끼어 들어 조직적으로 일사불란하게 한반도의 무력 적화를 진행시켜 왔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에 반하여 남의 형편은 처음부터 내외 여건이 복잡 미묘하게 엉겨서 혼미 상태를 거듭하면서 허다한 허점을 지니고 있었다. 한 마디로 「힘의 균형」은 남쪽에 결정적으로 불리했던 것이다.

<지금 형세는 남이 고무적>
그러나 지금의 「남과 북의 형세」를 그때와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여러 가지 고무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북괴의 침략성은 변하지 않았지만 이를 떠미는 소련과 중공의 이해 관계는 그때처럼 동일치 않다.
이에 반하여 이편 입장은 비록 주한 미군의 일부 감군이 예상되지만 한미 양국간의 상호 관련 도는 6·25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우리 자신의 군비도 상당히 강화됐다. 「내적 충실」만 더 기한다면 북괴 도발에 떨 필요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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