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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을 이기고…근대화에 헐리는 "개화 요람"…두 빌딩|한청 빌딩과 기독교 서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서울 종로 원두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한 기독교 협회, 한청 빌딩이 도시 계획에 밀려 그 모습이 사라지게 되었다. 종로 2가인 91과 관철동 102번지에 있는 이 두 빌딩은 근처의 YMCA와 함께 우리 나라 『개화산실』의 하나. 우리 나라에 온 외국 선교사들이 모두 종파를 초월, 복음 총 출판 센터로 출발한 서회와 민족 자문으로 일본 장인과 맞서 개업된 한청 빌딩은 민족의 수난과 함께 호흡을 같이해 길을 걸어왔지만, 지난날의 업적은 잊어진 채 철거를 앞두고 평당 철거비 5천여원으로 평가되고 있을 뿐이다e
종각 옆에 세워진 한청 빌딩은 이등박문의 시퍼런 서슬에도 굴치 않고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했던 이조 참정 대신 한규설씨의 손자 한학수씨가 지은 것. 한씨는 당시 남촌 (지금 명동) 에 자리잡은 일본인 상인들이 한국 사람들의 돈을 긁어 가는 것이 못 마땅해 상점을 열기 위해 지었다는 것이다. 양식부·식당·당구장은 그때만 해도 새 모습의 시설을 갖추어 새 문명에 눈뜬 청년들의 발걸음이 줄을 이었고 저절로 나라 근심하는 사람들의 토론의 광장으로 쓰여지게 되었다. 그후 한청 빌딩은 우리 나라 순수 문학지 『문장』지가 발간됨으로써 문인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문장』지를 발판으로 작가 김동리씨, 시인으로 박목월씨 등 이른바 청록파 그룹이 등장하게됐다. 그러나 일제는 끝내 한청 빌딩을 빼앗아 말년에 조선 문인 보국회를 이곳에 두었다. 이광수씨 등 우리 나라 작가들을 보국회 이사로 앉혀놓고 친일을 강요, 굴욕을 시킨 작가들이 순수 문학의 전당에서 한숨을 쉬고 있었던 곳이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적산으로 되자 「건준」이 인수하겠다고 덤비기도 했으며, 한때 좌익계 문학자 동맹의 소굴로 쓰였으나 연세대 재단에서 인수, 그후 사상계가 창간되기에 이르렀다.
또 대한 기독교 서회는 우리 나라에 와 있던 신교파 선교사들이 각종 종교 서적을 함께 펴내기 위해 마련한 곳.
80년 전에 구 건물이 지금 자리에 있었으나 현재의 5층 건물은 1931년에 지은 것이다.
서회 건물은 당시 서울 최초의 콘크리트 건물로 이름났었다. 서회는 이 자리에서 문서를 통한 전도 사업에 힘썼고 한글 맞춤법에 따라 책을 박아냄으로써 한글 보급에 큰 공헌을 했다.
게일 박사가 만든 최초의 한영 사전이 이곳에서 나왔고 기독교 신보·아이 생활·성경 주서·찬송가·새 벗·새 가정 등 2천여종에 6천여만권의 책을 박아 낸 곳이다.
서회는 우리 나라 최초의 맹인용 점자책을 만들어내는 등 아시아 최대의 종교 서적 출판소로 성장했다.
이곳에서 문학 잡지 『동광』지가 발간되었는가하면 김동환씨가 편집인이 됐던 『삼천리』는 이곳에서 폐간됐다.
갑오혁명 후 옥중에 갇힌 이상재·이승만 박사 등도 서회 선교사들이 넣어주는 서회 발간 서적을 읽고 세례를 받게되어 기독교와 인연을 맺어 훗날 많은 활약을 하게 되었다.
철거를 앞두고 서회는 이미 예지동에 10층으로 새 서회를 짓고 옮겼지만 우리 나라 문인들의 발판에 문턱이 닳고 복음의 출판 센터로 유서 깊은 자리는 새 도로에 묻혀 버리게 되었다.

<김영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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