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 무대서 대작 ‘위키드’ 누른 어른들의 인형놀이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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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인형놀이는 소꿉놀이와는 차원이 다르다. 엄마·아빠·아기 정도의 등장인물이 장난감 그릇에 모래·돌멩이·나뭇잎을 담아 밥 짓는 흉내를 내고 출근길을 배웅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역할극이 소꿉놀이라면, 인형놀이는 손에 인형을 쥐는 순간 초현실의 세계가 펼쳐지는 환상의 통로다. 지구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나라의 공주가 되어 반짝이 드레스를 갈아입고 근사한 성을 무대 삼아 멋진 왕자님과 춤을 추며 노는 것. 아이에게 인형이란 그렇게 실천적 판타지를 가능하게 하는 마법의 도구다.

그렇다면 어른이 인형놀이를 한다면 어떨까. 그것도 판타지의 대명사 뮤지컬 무대 위에서라면, 혹시 판타지의 끝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아니었다. 어른의 인형놀이라는 엉뚱한 상상에서 출발한 퍼펫 뮤지컬 ‘애비뉴Q’는 인형놀이와 뮤지컬이라는 판타지 도구를 이용해 “어른들 세상에 판타지는 없음”을 역설하는 고도의 풍자극이었다. ‘북미의 뽀뽀뽀’라 불리는 유서 깊은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 ‘세서미 스트리트’의 퍼펫쇼를 패러디해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인생의 목표를 어떻게 정할지 모르는 이들을 위한 인생재교육 플랜이기도 하다. ‘세상을 살면서 필요한 건 유치원 때 다 배운다’는데, 세상살이가 힘들다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교육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어른들의 인형놀이는 환상의 나라를 떠도는 아이들의 그것과는 정반대다. 손에 낀 퍼펫은 누구나 품고 있지만 차마 입에 담지 못하는 현실적 속내를 털어놓기 위한 장치다. 연애·취업·갑을관계·인종차별·동성애·포르노 중독 등 아무도 정답을 가르쳐주지 않는 개인적 고민과 사회적 이슈가 혼재한 냉혹한 현실을 여과 없이 들춰낸다. 노골적인 베드신이나 외설스러운 대사를 민망한 느낌 없이 폭소로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인형놀이이기 때문이다.

2004년 토니상 시상식에서 블록버스터 ‘위키드’를 제치고 최고작품상·극본상·음악상을 휩쓸었다는 이 화제작의 무대는 유명세에 비해 몹시 단출하다. 대극장 뮤지컬에서 기대하는 스펙터클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화려한 의상도, 웅장한 세트도, 절도 있는 군무도 없다. 총 10명에 불과한 출연배우는 하나같이 동네 어디서나 마주칠 법한 평범한 외모다. 퍼펫조차 별다를 건 없다.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 이웃의 다양한 모습을 은유할 뿐이다.

뉴욕에서 집값이 가장 싸다는 가상의 동네 ‘애비뉴Q’의 한 건물에 세 들어 사는 주민들은 서로 “내 인생이 최고로 엿같다”고 다투면서 루저 인생을 자처한다. 갓 대학을 졸업한 프린스턴에겐 돈벌이에 도움 안 되는 영문과 학위가 전부다. 첫 출근도 하기 전에 직장에서 잘리고, 통장 잔고는 바닥났으며, 인생에 뚜렷한 목표도 없다. 이웃의 유치원 보조교사 케이트와 사랑에 빠지지만 인생 목표를 세워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오히려 일도 사랑도 꼬여간다.

루저들에겐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고 ‘남의 행복이 나의 불행’인 법. 보통은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속물적 감정이지만 이곳 주민들은 당황스러울 만큼 당당히 속마음을 내뱉는다. 성공한 유명인을 게스트로 초대했던 ‘세서미 스트리트’ 포맷을 풍자해 추락한 유명인을 실명으로 등장시킨 것은 압권이다. 1980년대 공전의 히트를 친 드라마 ‘개구쟁이 아널드(Diff’rent Strokes)’로 글로벌 인기를 누리며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결국 빈털터리로 죽어간 아역 배우 게리 콜맨에게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을 노래하게 할 정도다. 동기부여가 아닌 동병상련이야말로 루저들이 원하는 값싼 처방이 아니겠느냐는 자조랄까.

그런데 이 지독하게 리얼한 뮤지컬이 내놓은 결론은 좀 혼란스럽다. 자기 목표만 찾던 프린스턴이 기부금을 모아 케이트의 유치원을 세워주며 “판타지는 없더라도 주변을 돌아보며 서로 돕고 살면 때로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지극히 동화적 모범답안이 제시될 땐 반전인가 싶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희망은 곧 허무와 뒤섞인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또는 ‘일장춘몽’급 깨달음을 내포한 엔딩곡 ‘For Now’는 “행복도 불행도 모든 것이 아주 잠시 동안만 유효할 뿐, 이 또한 지나가리라”며, “멀리 있는 목표를 좇기보다 현재에 충실하라. 너만 그런 게 아니고 모두가 조금씩은 불만족스럽게 산다”는 위로로 어깨를 두드린다. 어설픈 희망으로 미래를 포장하는 얄팍한 거짓말보다 팍팍한 현실을 직설하는 돌직구를 던져 잔잔한 공감을 부른 것은 분명 유효해 보인다. 하지만 꿈은 없고 위안만 남은 어른들의 인형놀이가 왠지 서글퍼 보이는 건 나 혼자뿐일까.

온라인 중앙일보·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설앤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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