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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자 영친왕은『그러면 해아 밀사의 고문으로 따라갔던 「헐버트」 박사는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고 물으셨다. 즉 이준 열사는 해아서 자결하고, 이상설씨는 해삼위로, 이위종씨는 「모스크바」로 각각 떠나갔지만 「헐버트」박사에 대해서는 아무 소식이 없으므로 그것이 몹시 궁금하게 생각이 든 때문이었다.
구한말에 을사보호조약을 중심으로 한국을 위하여 배일운동에 진력한 두 사람의 외국인이 있었으니, 한사람은 영국인「베델」 (배설= E. T. Bethell)이요, 또 한사람은 미국인 「헐버트 (흘법= Homer B. Hulbert) 로 「베델」씨는 대한매일신보를, 「헐버트」 박사는 「코리언·리뷰」 (Korean Review)를 각기 발행하여 일제의 한국침략을 강렬히 비난하고 공박하였었다.
그 중에도 「헐버트」 박사는 한국 청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한편 고종황제의 외교 고문이 되어「보호조약」을 분쇄하기 위해서 해아로 밀사를 파견할 때에는 특히 고문이 되어 고종황제의 친서를 가지고 밀사들보다 한 걸음 먼저 미국으로 가서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고 해아에 도착한 밀사가 아무리 고종황제의 신임장을 내보이고 평화회의의 참가를 간청해도 한·일 보호조약 때문에 한국에는 이미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발언할 기회조차 얻지를 못하게 되자 이번에는 회의장 밖에서, 혹은 신문사를 역방하고, 혹은 연설회를 통하여 한국의 억울한 사정과 일본의 배신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따라서 해아 밀사 사건은 최초에 고종황제가 기대한 바와 같은 크나 큰 성과는 없었으나 일제의 잔등이에 냉수를 끼얹고 한국의 독립정신을 전 세계에 표시하는데는 적지 않은 효과가 있었으니 일이 그 만큼이나 된 것도 국내에서는 「베델」씨가, 국외에서는 「헐버트」박사가 각기 일신의 이해득실을 초월하여 헌신적으로 노력을 해준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이등(박문)통감 밑에서 외무부장의 일을 맡아보던 「고마스」(소송록) 라는 자가 해방 전에 저술한 『일·한 합병 비사』를 보면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이등통감이 한국 수도 한성(서울)에 주재하고 있던 중에 소위 해아 밀사 사건이라는 중대사건이 돌발하였는데 그것은 고종황제와 미국인 고문 「하루바도」(즉「헐버트」) 의 합작으로 이상설 이준 이위종의 세 사람이 가담한 음모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고종황제는 필경 양위를 하게 되고 일·한 합병은 급전직하로 실현되었다. 「하루바도」는 교활무쌍한 자이어서 합병이 되자 즉시 퇴거명령을 내리었다』라고 말한 것만 보아도 당시 일본의 위정자들이 얼마나 「헐버트」박사를 미워하고 또 위험시했던 가를 잘 알 수 있다.
한국을 떠날 때 그는 자꾸 해아 밀사 사건의 진상을 묻는 「고마스」외무부장에 대해서 『내가 해아 사건에 관계하고 고종황제의 친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이 일을 하게 된 데에는 공명정대한 이유가 있다. 즉 한미통상조약 제1조에「어느 일방의 정부가 만약 제 삼국으로부터 압박을 받을 경우에는 다른 일방의 정부는 이를 원조하여 그 우정을 표하여야 됨」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나는 다만 이 조약상의 규정을 충실히 이행한 중개자일뿐이다』라고 대답한 후 『한국은 결국 독립을 회복하고야 말 것』이라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는 가기 싫은 길을 억지로 떠나고 만 것이었다.
그리하여 미국에 돌아간 「헐버트」박사는 8·15 해방이 될 때까지 꾸준히 한국의 해방을 위해서 음으로 양으로 많은 공헌을 하였는데 그의 일대의 명시 『패싱· 오브· 코리아』 (Passing of Korea)에는 머리말로 『이 책을 한국 황제폐하와 한국민족에게 바치느라』로부터 시작하여 『백귀가 횡행하고 정의가 소멸된 이 시대에 있어서 최대의 존경과 불변의 충성의 표식으로서 이 책을 삼가 한국 황제폐하께 올리나이다.』
『열화의 시련을 통하여 잠(수면)은 주검의 상징이기는 하나 주검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이 구한이 신한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사라지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한국민족에게 삼가 이 책을 바치노라』고 하여 고종황제와 한국민족에 대한 변함없는 충정을 표시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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