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의 현실부재 실증한 한국미술대상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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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허무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술가가 될 수 없다.
이 말은 특히 현대의 화가를 규정짓는 가장 핵심적인 명제가 될 것이다. 그럴 것이 우리들의 생활공간에서 만나는 모든 미술은 그 표현의 양식에 관계없이 흐르는 주조가 허무이며 그 허무가 간간이 광으로, 담으로 또는 동심으로, 해학으로 자기변주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전제하고 보면 아마 김환기씨의 그림(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은 담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어찌보면 그것은 청색과 백색을 섞어 짠 두터운 모직물을 확대시켜본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그것은 고공에서 내려다본 구획정연한 메가폴리스의 원경같기도하여 작가의 자유자재한 직관력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이런 점을 미루어보면 환상(슐)적인 작품을 보이던 초기의 경향이 지양되었던 것이 아니라 더욱 심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어찌되었든 이 그림에서 우리는 헤일 수 없이 많다(무한성)는 감정을 느끼는데 그것은 수묵화의 세계와 같은 차원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무한과 유한의 비례에서 전달되는 고독감은 그의 독특한(서구적인)발상법, 다시 말해서 네모꼴과 점의 배합에 단일 청색을 배게 함으로써 담보다는 오히려 차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언뜻 인간이 사는 사회를 해골로 바꿔놓은 몽드리앙의 부기우기를 보게되지나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상 이런 점을 우려하면서 그림을 이야기할 수 있는 화가도 우리 화단에는 별로 없다.
그것은 대부분의 화가들이 기술로서의 세련된 그림을 그리면서도 새 양식을 갖지 못한 까닭이다. 이는 더 말할 나위없이 허무, 말하자면 노시스적 체험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령 송수남(한국종이-70) 송영방(작품)등이 새 양식을 찾기위한 부단한 몸부림을 보이면서도 오히려 세련되었던 기술이 그들의 새 의도를 따르지 못하는 것은 역시 그들이 허무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아마 박주보(ㄱ) 정영렬(조국No.41)등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술로서 세련된 그림(상을 탄 그림들)보다도 이러한 세련된 기술에서의 탈피를 시험하는 노력이 훨씬 더 가치있는 작업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해야할 것이다. 그럴 것이 단순한 기술에의 추구(모방)는 예술이라는 명예로운 지위를 얻기엔 너무도 암담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기술의 세련이 없이 단순히 새 양식에 도전하려는 그러한 경향에 대해선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은 물론이다.
이번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조각은 역시 괄목할만한데 정강자(현상과 인식) 이승택(작품1970)등의 미니멀작업(현상학적 환원)은 지난번 AG전의 분위기 그대로인 것에 실망을 준다. 그것은 그들의 작업이 어쩌면 도식화한, 작업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상당한 전달력을 가졌던 정강자의 경우도 일회성(처음 유리판을 밟는 사람)의 혜택만이라는 약점때문에 거의 사물화한 작품을 방치해뒀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수상작인 『POINT-74』나 『네계02번』은 전시장을 벗어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말하자면 『내가 설 땅은 어디냐?』에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이 작품들이 시대적 혹은 사회적배경과의 함수관계로서의 창조가 아니라 단순한 도식학적 작품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대체로 이번 대상전에서도 공통되는 특징은 한국미술에 있어서 현실의 부재이다. 이러한 엄청난 상황은 예의 예술가의 1차적 조건을 대부분의 그들이 구비치못하고 있다는데 기인될 것이다.(6월10일∼7월9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초대작가=59점·공모입선=1백16점) <박용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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