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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관 페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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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관부연락선이 최초로 기적을 울린 것은 1905년9월25일이다. 연락선의 이름은 이끼마루(일기환), 1천6백92t. 이어 11월5일 그보다 1t이 적은 쓰시마마루(대마환)가 취항했다. 해일 1회씩 부산과 하관에서 출항-.
40, 50대이상의 사람들에겐 이 항로는 감상과 함께 많은 회상을 불러 일으켜 줄 것이다. 당시의 상황에선 관부연락선은 한 시대의 상징적 무대를 이룬다. 이것은 일본이 대륙으로 뻗는 하나의 발판 구실을 했다. 일본의 외교사절들이 끊임없이 이 연락선을 타고 대륙으로, 대륙으로 밀려갔다.
1905년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9월엔 포츠머드에서 강화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이제 세계의 열강으로 그 면모를 뚜렷이 하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는 어쩔 수 없이 일본의 발언권에 휘말려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청국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노일전쟁의 결과도 역시 러시아를 밀어냈다.
한반도를 두고 노·청·일이 벌이던 그 줄기찬 각축전은 일본의 전승으로 허탈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일본은 이 승전의 후광과 함께 대륙경영의 가교를 놓은 셈이다. 현해탄을 건너는 관부연락선의 기적소리는 우렁찰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좌절과 침통과 울분은, 그러나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망국의 청년들은 그래도 그 울분을 누르며 이 선로에서 희망을 찾으려 했다. 세계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일 것 같다. 신문화의 현란한 물결은 우리를 어지럽게 만들었으며, 그럴수록 민족자존의 염도 새로와졌다. 20세기의 초입에서 우리가 겪은 그 시대상을 함축한 상징의 무대가 있다면 바로 이 항로일 것 같다. 신세기의 명암, 식민지의 쓰라린 체험, 민족적 자각, 신사조와의 갈등과 혼미‥.
16일 일본의 남항하관에서 취항식을 올린 부관 페리는, 새삼 우리의 회상을 자아내게한다. 물론 시대도 바뀌었고, 우선 배의 명칭부터 항구명을 거꾸로 부관패리라고 했다. 이게 감상도 유별나게 있을 리 없다.
선체도 3천t급 항해시간은 불과 7시간, 게다가 마이카까지 동행할 수 있는 호화선. 레저시대의 기적을 울리는 심벌이라고나 할까.
언젠가 시대가 또다시 바뀌어 대륙을 통행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이 페리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긴 너무 아슬한 상상을 할건 없다. 우선 오늘만해도 시대는 벌써 바뀌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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