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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가장 길었던 3일(32)|작전지도의 혼돈(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육군본부가 미군사고문단(KMAG)단장대리 윌리엄·라이트 대령으르부터 맥아더 전방지휘소(ADCOM)가 한국에 설치된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했던 시흥으로부터 27일하오 6시쯤 서울에 복귀했다는 것은 이 연재 제31회에서 기록한대로이다.
그런데 육본의 이런 서울복귀는 신성모국방장관의 의도와는 정반대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즉 미군사고문단의 종용을 받은 채병덕참모총장이 독단으로 육본의 복귀를 명령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신국방은 지연작전원해>
이 대목은 국방장관 비서실장으로있던 신동우중령(현경향신문전무·50)의 증언으로 뒷받침되고있다.
"27일하오 4시쯤에 신장관은 수원역장실에서 대전과 통화를 하려고 애쓰고있었는데, 이때 미대사관의 아마 트럼라이트참사관으로 생각되는데, 그분이 와서 장관에게 귓속말을 하고 갔어요. 장관 얼굴이 금새 환하게 밝아져요. 메모지에 무엇을 적더니 나를 불러요. 그리고는 내용을 이 자리에서 외라는 거예요. 메모지에는 간단히 채병덕장군귀하, 미군이 공군과 해군을 가지고 우리를 도우러 오게돼있으니 귀관은 육본을 시흥으로 옮기고, 미군이 올때까지 병력의 소모를 적게하면서 지구전을 전개하라. 국방장관 신성모 라고 적혀있어요.
내가 다 암기하니까, 메모지를 도로 뺏어서 성냥불로 태워버리더군요. 내가 만약 도중에 적게릴라에게라도 잡혀서 정보가 샐까 염려한 거지요. 그분에 대해 시비가 많지만, 장관은 그런 치밀한 일면도 있었어요. 나는 즉시 지프로 시흥보병학교로 가서 채참모총장을 만나 신장관명령을 구두로 전했읍니다. 옆에 신상철대령(현주월대사)도 있었는데 채장군은 대뜸 육본은 서울로 간다. 수도를 사수하겠다고 고함을 쳐요. 내 생각에는 신장관이 그때까지 육본이 이미 시흥으로 철수한 것을 몰랐던것 같애요.
하여간, 장관명령은 분명히 미군이 올때까지 병력을 아끼며 지구전을 전개하라는 것이었읍니다."

<여론은 서울뺏기면 망한다>
아무리 북새통이라고는 하지만, 국방장관이 육본철수를 모르고 있었다는것도, 그리고 참모총장이 이런 중대조치를 장관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참모총장이 지구전을 벌이라는 장관의 의견을 듣지않고, 서울사수를 결심한 점이다.
하지만 일부인사들은 미군참전소식을듣고 수도를 지키겠다고 부랴부랴 서울로 다시 올라간 채총장의 심경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수도사수 문제에 대해서는 당시의 대부분의 고급장교들이 서울을 빼앗기면 곧 대한민국은 망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여수·순천반란사건을 비롯한 공비의 준동으로 미루어보아 수도가 함락되면, 이들의 봉기로 지방은 자연히 무너진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다.

<수도사수의 집념 오히려 화>
이것은 일리가 있는 생각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정세의 오판이었으며, 이 수도사수의 집념때문에 결전의 장소와 시간을 택하지못한채 서울북방에서 많은 병력을 소모하였다.
서울에 복귀한 육본지휘부는 우선 다급한 미아리전선방어에 총력을 기울였다. 채총장 스스로가 일선에나가 마이크를 들고, 미해·공군투입을 알리면서 장병들을 격려했다.
그러나 이 방면에 포진한 병력은 너무도 미약했다. 제1, 제3, 제5, 제16, 제22, 제25연대의 잔존병력과 제5사단 12연대의 제2대대, 제20연대의 제1대대, 수도경비사의 제8연대 제2대대를 합쳐서 모두 5천명미만의 혼성병력이었다. 거기에다 피난민떼와 여기에 적게릴라들이 뒤섞여 전선유지가 극히 곤란했다. 이때 모습을 당시 대한여자청년단장으로 있으면서 30명의 단원을 이끌고 전선위문차 나갔던 모윤숙여사(시인·61)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참호도 없던 미아리전선>
"27일 저녁때 30여명의 단원을 트럭에 태우고 미아리고개로 갔어요. 피난민이 수없이 넘어오고 많은 군인들도 오고가는데 징신을 차릴수가 없더군요. 이웃 아낙네들이 주먹밥을 해다 군인에게 주고 여학생들이 물도 길어다주고하는 눈물겨운 모습도 보이구요. 군인을 붙들고 마구우는 여자들도 있있어요. 나는 마이크를 들고, 서울을 빼앗기면 우리는 갈데가 없으니 부디 잘 싸워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단원들에게는 군가를 복창시키구요. 사람의 심리란 묘한 것이어서 이런 분위기에 젖어드니까 저절로 눈물이나요. 그리고 여기서 군인들과 함께 싸우다가 죽어도 정말 좋다는 생각이 들구요. 어떻게나 잘싸우라고 악을 썼는지 나중에는 목이 쉬어서 목소리가 안나와요."
서울의 마지막 방위선인 미아리전선은 말이 방위선이지 참호진지나 적당한 은폐물도 별로 없었다. 의정부와 창동에서 패해 분산후퇴하는 잔존부대의 임시집합소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이 밤만 넘겨 지탱하면 미해·공군이 온다니까 어떻게 되겠지하는 한가닥 희망만이 남아 있었다.

<얕잡아 본 북괴의 의도>
또한 가장 무서운 적의 장비인 T-34 탱크도 미공군기를 보면 간단히 물러설 것이며 잘하면 북괴가 미해·공군 투입결정소식을 듣고 아예 남침을 단념하고 38선까지 되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다. 북괴의 의도를 이렇게 얕잡아 평가한 것은 미국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감히 우리 대국에 맞서겠느냐"고….
아뭏든 서울의 운명을 건 미아리전선에는 위로는 환갑의 노구를 이끌고 진두에선 제5사단장 이응준소장으로부터, 아래로는 20세미만의 어린 병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숨을 죽이며 적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하고 북쪽을 노려보았다. 그러면 이제 27일밤의 미아리방어 전투상황을 세명의 참전지휘관으로부터 들어보자.

<후퇴병력으로 혼성부대>
▲이응준씨(당시제5사단장·현한국반공연맹이사장·81)
"광주에 본부를 둔 내사단은 주로 지리산공비를 토벌하고 있었는데 사변이나자, 수송편이 되는대로 서울로보내 전선에 투입했어요. 한사단 전부를 한군데 보낸게아니라 작전명령에따라 최영희대령(현대한통운사장)의 l개 연대는 문산봉일쪽에, 그리고 박기병대령의 20연대 일부는 의정부방면으로 보냈지. 27일 낮이 되니까 미아리안에 아군병력과 장비가 꽉찼어. 전방에서 후퇴한 부대와 서울에서 새로 들어온 병력등으로 많은 혼잡을 이루었어요. 유재흥준장과 함께 이들 혼성부대를 대충 수습해가지고 미아리 공동묘지 일대에 진을 쳤지. 왼편에서는 김계원대령(예비역육군대장·현중앙정보부장)의 포병부대가 몇문의 포로 창동방면의 적에대해 교란포격을 가하고….

<돈암동 뒷산에 적신호탄>
이렇게해서 밤이 됐는데 어느새에 적탱크가 아군진지에 침투했단 말이야. 캄캄하니까 피아를 분간할 수 없는데다가 돈암동 뒷산언덕에서는 이상한 신호탄이 자꾸 올라가고…. 물론 피난민에 섞여 후방에 들어간 적게릴라 짓이지. 이렇게 되니까 방어선이 뚫리기시작했는데 헌병중대를 시켜 독전을 했으나 소용이없어요. 밤12시쯤 참모장 박병권대령(현대한중석사장)에게 육본에 가서 현황을 보고하고 작명을 받아오라고 보냈으나 돌아오지를 않아요.
이번에는 헌병을 인접 유재흥사령부에 보냈더니 다후퇴해서 아무도 없다는거야. 그래서 병기참모 김용순대령(현국회의원)과 사병 한명을 데리고 도보로 미아리 고개너머의 사단사령부까지 후퇴했는데 텅 비어 있어요. 누구 없느냐고 소리쳤더니 한 사병이 나오는데 내 운전병이야. 그때까지 숲에다 지프를 감추어두고 나를 기다렸던거야. 이남규라는 이사병은 내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데 애석하게도 그후 광주에서 전사했어요."

<미고문, 논밭에 탱크 무용주장>
▲유재오씨(당시의정부지구전투사령관·현주이대사·49·일시귀국했을때회견)
"6월10일의 인사대이동으로 7사단장에 취임한후 적정에 관한 보고가 들어오는데 탱크 이동이 빈번해요. 그래서 상부에 대전차지뢰를 달라고 몇번 졸랐지만, 미고문들이 안믿어요. 남침하면 세계대전을 유발하니까 안내려올 것이고, 탱크도 논이 많은 한국지형에는 쓸모가 없다는겁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진지를 구축하다가 적침을 받은셈이지요. 내 사단전면에 적탱크가 80대는 온 것 같은데 그래서 결국 밀렸어요. 내 사단의 미군공병고문 모어소위가 직접 바주카포로 적탱크를 쏘았지만, 끄떡도 안하니까, 이런 장비로는 안되겠다고 저들 상관을 마구욕해요.
미아리에서는 이응준소장·김계원대령·강문봉대령·박기병대령과 함께 싸웠는데 역시 적탱크때문에 뚫렸지요. 28일새벽 2시쯤에 육본에 가서 전황을 보고하니 채총장은 육본은 철수하니 계속 일선을 지키라고해서 다시 미아리로 왔다가 새벽 5시쯤 후퇴했읍니다."

<자주바뀐 미아리 지휘권>
▲박기병씨(당시5사단20연대장·예비역육군소장·현성우구악부사무총장·53)
"육본에서 미아리쪽이 위험하니 가서 막으라해서 27일 낮에 혼성 1개대대를 이끌고 출동했더니 사태가 아주 긴박해요. 서울사수가 곤란하다고 느꼈지요. 그러나 막을때까지 해보자고 독단으로 헌병을 시켜 GMC 트럭을 모아다 군데 군데 바리케이드를 쳤지요. 이때 현장에 나왔던 채총장이 이 방면부대는 모두 박대령 명령을 받으라고 했어요. 5천명정도의 병력이지요. 그러나 밤 11에는 다시 이응준사단장의 명령을 받으라는 작명이 왔어요.
이 사단장은 아주 침착하게 명령을 내려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나는 15명의 특공대를 조직, 다이너마이트도 준비했습니다. 28일새벽 2시쯤 밤이 깊어 비가 퍼붓는데 나는 사단지휘소에서 깜빡 잠이들었어요. 옆에있던 김한주대위가 적이 벌써 뒤에 침투했다고 깨워요. 급히 육본에 연락병을 보냈지만 돌아오지않아요. 사단지휘소도 거의 비었구요. 그래서 할 수 없이 28일새벽 3시쯤 남아있는 부하들에게 각개약진해서 성남고교에 집합하라는 후퇴령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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