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안갯속 출구전략 … 신흥국만 죽어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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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증시가 22일 6% 가까이 급락했다. 2008년 10월 이후 가장 큰 폭의 하락이다. 필리핀 마닐라 증시 거래장 전광판에 주가가 깜빡이고 있다. [마닐라=블룸버그]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신흥국발 외환위기 가능성에 시달리는 글로벌 증시에 미국발 ‘양적완화 축소 불확실성’까지 더해졌다. 충격은 신흥국 시장에서 더 크게 나타났다.

 22일 신흥국 외환위기설의 핵으로 지목된 인도네시아 증시는 1.12% 떨어지며 반등한 지 하루 만에 하락세로 돌아섰다. 나흘 연속 큰 폭으로 하락했던 인도는 전날보다 소폭 상승하며 한숨 돌렸지만, 태국과 말레이시아·대만·싱가포르 등 신흥국 증시 대부분이 떨어지며 수일째 하락세를 이어갔다. 이만큼은 아니지만 선진국 증시도 약세를 면치 못했다. 21일(현지시간) 미국의 다우산업지수는 0.7%, S&P500지수는 0.58% 하락했다. 영국(-0.97%)과 프랑스(-0.34%) 증시도 미끄럼을 탔다.

FOMC 7월 회의록서도 대립 팽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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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가 이날 공개된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공개시장위원회(FOMC) 7월 회의록의 여파였다. 시장에 풀던 돈줄을 조이는 출구전략이 언제 시작될지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벤 버냉키 의장이 지난 6월 밝혔듯 연준이 연내 양적완화 축소에 착수하는 건 기정사실이 된 지 오래다. 남은 변수는 그 시기가 언제냐는 것이다. 올해 남은 연준 회의는 9월, 10월, 12월 세 차례뿐이다. 그런데 10월엔 회의 후 버냉키 의장의 기자회견이 예정돼 있지 않다. 버냉키가 중요한 정책 발표 땐 기자회견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점에 비춰볼 때 9월 아니면 12월일 가능성이 크다.

이날 회의록이 공개되기 전까진 ‘9월설’에 더 무게가 실렸다. 최근 경기지표가 꾸준히 호전돼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9월설을 낙관하기 어렵게 됐다. 회의록을 보면 연준 내에선 아직 ‘비둘기파’와 ‘매파’의 대립이 팽팽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신흥국 외환위기 공포 더 키워

 더욱이 연준은 올 하반기 경기도 어둡게 봤다. 주택·자동차 판매 시장이 눈에 띄게 회복되고는 있지만 고공행진 중인 실업률이 더디게 떨어지고 내년 예산을 둘러싼 여야 정쟁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출구전략에 착수하자면 경기 회복이 전제돼야 하는데 경기가 하반기에도 비실거린다면 양적완화 축소 가능성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마냥 시간을 끌기도 어렵다. 버냉키 의장 입장에선 글로벌 금융위기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자신의 치적을 공인받으려면 퇴임 전 출구전략에 착수해야 한다.

월가의 의견도 양분돼 있다. 시장조사회사 IHS글로벌인사이트는 “연준이 9월엔 양적완화 정책 축소에 나서지 않을 거란 심증이 더 굳어졌다”고 본 반면 바클레이스는 “9월에 축소할 거란 예상을 수정하지 않을 것”이란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뉴욕타임스(NYT)는 “연준이 딴 건 몰라도 시장을 헷갈리게 만드는 덴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신흥국 외환위기 공포감과 분투를 벌이는 글로벌 시장에 도움을 줘도 모자랄 미 연준이 오히려 불확실성이란 짐을 얹어준 셈이다.

 국내 금융시장도 소나기를 피해갈 순 없었다. 22일 코스피지수는 전날보다 0.98% 떨어진 1849.12로 장을 마치며 3일 연속 1% 안팎의 하락세를 이어갔다. 코스닥도 2.43% 떨어지며 전날(-1.3%)보다 하락폭을 키웠다.

피치 "한국 안정적” 신용등급 유지

 한국 시장을 보는 외부의 시선에는 아직 큰 변화가 없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는 한국의 신용등급을 ‘AA-’로 유지한다고 이날 발표했다. 피치는 “한국은 가계부채와 세계경제, 금융 환경 변동 등 불안요인에 대응 가능하다”고 평가했다. 2분기 경제성장률도 2.3%를 기록할 것으로 예측했다. 다만 피치는 “악화되는 은행 재무건전성이 향후 평가에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봤다.

한국에 대한 또 다른 우려의 시선도 있다. 다른 신흥국보다 상대적으로 경제 여건, 소위 펀더멘털은 강하지만 위기가 전염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홍콩에 기반을 둔 CIMB증권 제임스 토드 연구원은 “한국이나 대만·싱가포르 같은 나라들은 상대적으로 경제 여건은 좋지만 저금리 기조 속에 카드 같은 신용 소비가 늘면서 가계부채가 급증했고 자산가치 역시 버블이 형성돼 있다는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이 증권사 한국법인 이도한 리서치부문장은 “2004년 당시 그린스펀 미 연준 의장이 경기부양 노선을 버리고 금리를 올릴 당시 그 여파가 한국 증시에서 6개월여간 지속됐다. 지금 상황이 그때보다 좋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덧붙였다.

 허진욱 삼성증권 연구원은 “미국 양적완화 축소는 이미 예견된 만큼 어느 정도 시장에 선반영이 돼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인도발 외환위기 가능성 변수가 있는 한 당분간은 시장 불안을 견뎌야 한다”며 “한국이 인도나 인도네시아와 다른 건 분명하지만 외국 투자자들이 볼 때 모두 신흥국일 뿐”이라고 말했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서울=정선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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