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노동'에 몸도 지쳐, '마음의 힘'을 믿어야...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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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병원 정형외과 전문의/ '의사는 수술 받지 않는다' 저자

어느 70대 노인, 엉치 관절이 슬금슬금 아프다고 병원에 오셨다. 몇 달 전에도 다른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았었는데 그래도 계속 아프다고. 이런저런 병증을 파악하고 현재 복용 중인 약들을 체크하고 진찰을 하고… 문득 환자분이 하시는 말씀,

"정형외과 의사선생님들은 참 쾌활하단 말이예요."

나는 이 말이 참 좋았다. 의사들의 활달한 태도는 환자들에게도 전염이 된다. 그리고 거꾸로 환자들이 즐겁게 말하면, 의사들도 힘이 난다. '쾌활함'이란 치유력이 엄청난, 보이지 않는 처방이고 약이다.

어느 60대 아주머니 어깨가 아프다고 왔다.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 만드느라 맥반석 솥에 누룽지를 만들어 긁었고 손으로 감자를 갈았다고 한다. 평소 단련이 안 되어 있던 근육을 갑자기 무리하게 쓴 것이다. 하지만 이 분은 금세 좋아질 것이 보인다. 왜냐하면 아픈 애길 하면서도 연신 웃음을 터뜨리고 있고 무엇보다도 부부 금슬이 좋으니.

한번은 병원에서 크리스마스 무렵 입원 중인 환자들을 위하여 연말장기대회 행사를 했는데, 대상과 인기상을 우리 정형외과 환자들이 모두 휩쓸었다. 깁스한 다리지만, 목발을 짚고 껑충껑충 날라 다닌다. 목청도 좋다.

"아니, 저기 61동에 입원한 최아무개씨 아니야?"

나는 뒤에서 보면서 박장대소를 했다. 로비에 모여 있는 다른 환자들을 둘러보니 휠체어 끌고 호흡기 달고 배에 호스 꽂고…... 구경하기에도 벅차 보인다. 역시 정형외과야.

그런가 하면, 찡그린 얼굴의 환자들도 있다. 그들의 통증에 대한 사연을 듣고 있노라면 아파서 찌푸린 것인지 찌푸리고 살다 보니 아프게 된 것인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가늠이 안 된다. 얼굴에 '난 아파요, 난 불행해요.'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 같다. 병명은 '불행'이다. 이들에게 '쾌활함'을 처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 약은 주고 싶다고 주사기로 찔러 넣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인이 그렇게 되겠다는 마음가짐이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쉽지 않다. 종일 매장이나 창구에서 고객을 대하며 강요된 미소와 친절함을 유지해야 하는 직업 말이다.

사실 의사도 이 중 하나다. 고객 중에 별별 사람이 다 있을 것이니, 그 중엔 화를 잘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까탈스런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사람들을 일관되게 친절한 태도로 대하고 나면 일과가 끝날 무렵에는 본래 자신의 감정은 무엇이었는지 도무지 떠오르질 않는 상태가 된다. 지나치게 소모된 명랑함 때문에 신경이 와해되어 아무 감흥도 느끼기 힘든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평정심을 즐겁게 유지하는 것은 건강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의식적인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철학적인 얘기처럼 들리지만, 참 중요한 요소다. 몇 가지만 짚어 보자.

첫째는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약간은 둔감해진다. 공감은 하되 그 희로애락의 드라마에 너무 깊이 빠져 들어 내 본성이 함께 매몰되지 않도록 경계하여야 한다. 예민한 의식을 지닌 사람들일수록 더 쉽게 사로잡혀 정서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아플 수 있다.

둘째는 작은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우리 세대가 어렸을 때에는 집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큰 주전자에 물을 끓여다가 세숫대야에 붓고 찬물과 섞어가며 씻곤 했었다. 물론 그 때에도 '틀면 나오는 뜨거운 물'이라는 아직 평준화 되지 않은 미래를 이미 경험하고 있는 집들도 있었다. 어쨌든, 그래서인지 어른이 된 지금 아침마다 샤워기를 틀어 따뜻한 물이 머리 위로 쏟아질 때면 나도 모르게 '감사해'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뜨거운 물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감사한 일은 너무나 많다. '내 다리로 걸어 다닐 수 있어서 감사해.' '내 눈으로 찬란한 아침 햇살을 볼 수 있어서 감사해.' '거르지 않고 똥을 잘 눌 수 있어서 감사해.' 사소한 일상에 감사하면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느긋해질 것이다.

셋째는 기분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특효 해소법이 있다. 소리를 지른다든지, 술을 마구 먹는다든지, 쇼핑을 가서 지른다든지.. 하지만 이렇게 폭발적이고 소모적인 방법들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자주 사용할 수도 없다. 보다 정적이지만 효과적인 방법들이 있다.

잠시 창밖을 내다본다. 먼 산 풍경이나 날씨에, 혹은 거리를 종종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잠시 눈길을 주며 심호흡을 한다. 차를 한 잔 마신다. 경콰한 음악을 듣는다. 그리고 평소 좋아하는 경구나 일화를 떠올린다. 솔로몬 왕은 기쁜 일이 있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이것도 지나가리라'라는 문장을 떠올려서 마음을 다스렸다고 한다. 나는 아씨시의 프란체스꼬 <완전한 기쁨>이라는 짧은 일화을 생각한다. 그러면 마음이 한결 누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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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박사 기자 osgirl@korea.com <저작권자 ⓒ 중앙일보헬스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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