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게, 어긋나게 … 시는 언어의 배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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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도이던 김언(본명 김영식)은 말의 세계에 빠져 시인이 됐다. 이름도 말을 뜻하는 ‘언(言)’으로 바꿨다. 떠도는 말들이 ‘말의 세계’인 시집으로 묶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잘 짜인 미로(迷路)다. 시인 김언(40)의 신작 시집 『모두가 움직인다』(문학과지성사)가 그렇다. 그러니 그 속에서 길을 잃어도 난감할 일은 아니다. 길이 사라진 자리는 또 다른 길을 향한 시작일 수 있으니….

2009년 미당문학상 수상작 포함

 4년 만에 엮인 그의 네 번째 시집에는 2009년 미당문학상 수상작인 ‘기하학적인 삶’도 실렸다. “세 번째 시집(『소설을 쓰자』)과 확 다른 것, 세계가 다른 것을 쓰고 싶었는데 쉽지 않더군요. 의도적으로 바뀌지는 않는 듯해요. 내 안에서 갱신되는 거지.”

 문학평론가 이남호는 김 시인의 특징을 “독특한 발상법으로 익숙하고 때묻은 삶과 현실의 문제를 낯설게 드러낸다”고 했다. 이번에도 그만의 색채는 여전하다. 언어는 떠돌고 방황한다. “이유를 다 알고 있는 정답을 다시 확인케 하는 건 다른 것으로도 할 수 있죠. 시는 갸우뚱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해요.”

 그래서 그의 시는 이렇게 조금씩 빗나가고 비껴간다.

 ‘나는 항상 실패한다. 나는 항상 시도한다. 나는 항상 물거품이다. 나는 항상 신비하고 절망한다. 나는 항상 이유다. 나는 항상 결론이고 거의 없다. ’(‘나는 항상 실패한다’ 중)

 “ 시는 어긋나게 하는 거에요. 무언가가 어긋나서 오면 매 문장이 조금씩 배신하며 나가는 것. 앞 문장을 완전히 지워버리거나 완전한 배신이 아니라 조금 어긋나는 거죠. 비유하자면 담배연기처럼 풀어지는 문장인데, 그 다음이 뭔지 알 수 없잖아요.”

 어쩌면 그가 의도하는 어긋남은 시집 제목인 ‘모두가 움직인다’를 구현하는 방식이다.

 “정지해 있지만 사실 모두 움직이고 있죠. 분자나 입자의 수준까지 살펴보면. 1초 전과 1초 후의 세계를 비교하면 다시는 복귀할 수 없는 세계에요. 한 시점을 고정해서 정지 상태를 포착하기 어렵고, 움직이는 세계를 말하기도 어려운 거죠.”

 이처럼 세상은 항상 움직이고 있으니, 그는 의심한다. 우리가 이름이라 부르는 것 이 실체에 들어맞는지.

 ‘여기서 만져지는 물질이란 모두 내가 만지기 위해/탄생한 물건들 이름들 형제들 그리고 하나같이 죽는다/…(중략)…/이 문장 말고도 생각할 것이 많다. 물질은 손을 떠날 때/한 번 더 이름을 보여준다. 그 전까지 그 이후에도/우리의 통성명은 무척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곧 잊는다. 다시 만날 것처럼.’(‘이 물질의 이름’ 중)

건조했던 문장, 촉촉함 더해

 의심과 의문으로 무장한 그의 시는 건조하다. 그렇지만 시인 내면의 갱신이 시작된 걸까. 말의 나무인 시가 풍성한 잎을 드리울 것을 약속하듯, 그의 말이 촉촉하게 물을 머금었다.

 ‘풀이 자라는 방향으로/꽃망울이 터지는 방향으로/하늘보다는 땅에 가깝게/좀더 축축하게/가라앉는 그 문장을/모조리 끌어 올려/새로 태어나는 나무//하늘보다는 땅에 가깝게/뿌리보다는/좀더 뿌리 밑으로/나무가 자라는 방향으로/말은 퍼진다’(‘말’ 중) 김언, 그의 말이 시를 타고 퍼져나간다.

글=하현옥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언=1973년 부산 출생. 98년 ‘시와사상’으로 등단. 시집 『숨쉬는 무덤』 『거인』 『소설을 쓰자』. 미당문학상·박인환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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