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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3년>|가장 길었던 3일(2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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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괴군이 침공을 개시했을 때, 38선에서 수도서울에 가장 가까운 경원가도를 주 공로로 택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다 짐작했던 사실이다. 38선에서 동두천 의정부를 거쳐 서울까지는 50㎞밖에 안된다. 길도 기갑부대 이동에 안성맞춤인 탄탄대로이다. 이 요로를 유재흥 준장의 제7사단이 지키고 있었다. 사단CP를 의정부에 두고 함준호 대령의 1연대를 동두천에, 윤춘근 중령의 9연대를 포천 방면에 각각 배치했는데 적침을 받았을 때 이 사단은 예비연대가 없었다.
예비연대였던 이상근 중령(전사·이형근씨 실제)의 제3연대는 서빙고에 있었지만 6월15일에 수도 경비사에 흡수되고, 제2사단의 25연대가 6월20일까지 의정부에 도착키로 돼있었으나, 주둔지역보상문제로 이동이 지연되고 있었다. 이렇게 7사단은 처음부터 「부실한 태세」로 막강한 적침을 맞게되었다. 예비연대만 제대로 갖고 있었더라도 서울함락을 며칠 더 지연시켰을 것이라는 것이 군사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예비연대 없었던 7사단>
북괴군은 경원가도에 2개 사단과 2개 탱크연대를 투입했다.
괴뢰군 3사단은 제109 탱크연대와 함께 포천 방면에, 그리고 그들 제4사단은 107 탱크연대와 함께 동두천방면에 각각 쇄도해왔다. 여러 기록을 보면 괴뢰군은 남침 때 1백20대의 소제 T-34탱크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중 적어도 3분의2를 이 방면에 투입했었다. 주 공로인 점도 있지만 앞서도 말한바와 같이 지형이 탱크이동에 좋았기 때문이다.
7사단의 전초진지는 우선 9연대방어지역인 포천 방면부터 뚫리기 시작했다.
연대장 윤춘근 중령은 4시30분, 제2대대장으로부터 적침 보고를 받고 사단장에 알리는 동시 곧 연대에 비상을 걸었다.

<9연대 차량은 트럭5대뿐>
그러나 대부분의 대원이 외출 중인데다가 육본의 차량정비계획에 따라 여러 차량을 반납했기 때문에 트럭이 5대밖에 없었다. 나중에 소상히 다루겠지만, 6·25때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이 차량정비계획도 그 중의 하나이다.
여하간 9연대는 의정부에 가서 민간버스를 징발, 적침 5시간만인 상오9시에 겨우 제1대대 증원부대를 급파했으나 적은 이미 만세교리를 돌파한 다음이었다. 적 탱크 부대는 상오11시에 포천을 손아귀에 넣었다.
한편 서빙고에 있는 이상근 중령의 제3연대는 원래 7사단 소속이었다가 수도 경비사로 예속된 인연으로 포천 증원 출동명령을 받았는데, 부대집결이 늦어 혼합 편성된 제3대대가 상오11시에 전선에 도착했지만, 적 탱크의 급진으로 분산 후퇴했다.

<제1연대와 포병대는 선전>
7사단 중 가장 선전한 부대가 동두천방면에 포진한 제1연대와 사단포병대대의 제2포대였다. 김한주 중위가 지휘한 이 포병대는 105㎜포의 정확한 포격으로 적 탱크8대를 부수고, 1개 대대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이 때문에 적은 부대재편을 위해 일단 후퇴했다.
괴로군 제4사단과 107탱크연대는 25일 저녁7시쯤에야 겨우 동두천을 점령할 수 있었다. 포천과 동두천의 상실로 의정부는 극히 위태롭게 되었다. 25일 두 번이나 의정부전선에 나온 채병덕 참모총장은 이때 26일 새벽을 기해 적에 대한 반격을 명령하였는데 이 작전명령을 싸고 큰 물의를 일으켰다. 즉 채 총장은 7사단은 동두천을, 그리고 대전서 의정부로 이동중인 제2사단은 포천을 각각 탈환하라고 명령했다. 2사단장 이형근 준장은 반격의 부당성을 건의했다. 즉 내일아침까지 사단 주역인 제16, 25연대의 도착이 기약 없을 뿐만 아니라 선착한 2개 대대만으로는 반격이 성공할 수 없으므로 후속부대의 도착을 기다려 집중 운용하자는 것이 이형근 준장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채 총장은 무조건 반격하라는 것이었다.

<총장과 사단장 대립>
개인적으로도 별로 다정한 사이가 아닌 두장군의 이와 같은 대립은 가뜩이나 위급한 전선을 앞에 놓고 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했다.
이때의 경위를 이형근씨(현 행정개혁조위장·50)로부터 들어보자.
『긴말 할 것 없이 나는 6월23일에 대전에 부임, 24일에 일부 부대 순시를 마치고 6·25를 만났어요. 그러니 부대실정을 소상히 알지 못하고 있었지. 이날 우선 대전에 있던 1개 대대를 이끌고 상경, 육본에 들렀더니 의정부로 가라는 거예요. 채 총장은 적정이나 지형도 잘 모르고 마음 내키는 대로 작전명령을 내린 것 같애.
26일 새벽3시쯤 의정부에서 육본으로 와서 주 진지를 한강이남으로 설치하고 시민도 빨리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이 대통령에게 가서도 그렇게 건의했더니 「국방장관이 하고 있어요」라고만 해요. 신익희·장택상·윤치영 씨한테도 가서 전방의 실정을 이야기하고 빨리 남하하라고 했지요. 의정부북방에 대한 반격이란 전투경험이 없는 부대를 축차투입해서 병력소모만 가져오겠기에 반대한 겁니다.』

<적 탱크에 무너진 반격작전>
미국의 전사가 로이·E·애플먼도 그의 저서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에서 채 총장의 이 반격계획이 무모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형근 제2사단장은 채 총장 계획에 대해 주력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보류하자고 건의했으며, 참모총장을 수행한 하우스먼 대위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러나 채 총장은 굳이 반격을 강행하라는 것이었다. 제2사단은 사단사령부와 제5연대의2개 대대만이 의정부에 있었다.
26일 아침에 유재흥 준장이 7사단의 일부 병력으로 반격을 개시했지만 적 탱크에 압도되고 말았다. 괴뢰군3사단 7연대는 26일 저녁에 의정부에 돌입했다.
이사단장이 반격을 했더라도 성공치 못했을 것이다. 채 총장이 그 미약한 병력을 포천 반격에 투입한 것은 확실히 잘못이었다.』
그러나, T·R·페런바크 저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에서는 이형근 준장 태도를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사단장은 2개 대대를 의정부 북방 2마일 가도에 배치하고 그들에게 참호를 파게 하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미약한 대대의 공격은 무익하다는 것을 알고,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약 40대의 탱크가 2사단진지를 뚫고 의정부로 들어왔다. 7사단은 적이 의정부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뒤가 달려 반격을 중지하고 후퇴명령을 내렸다.
예측하지 않았던 2사단의 후퇴로 7사단도 뿔뿔이 헤어지기 시작했다. 이형근 준장은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채 총장 명령에 응하여 반격을 강행했다해도 실패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7사단일부만 반격참가>
26일 아침의 반격은 실패했다. 사실 7사단의 일부가 반격에 참가했을 뿐 2사단은 사단장의 이의와 병력미달로 제대로 움직이지를 못했다. 채 총장은 의정부가 적 수중에 들어간 후 2사단장 이형근 준장을 구두명령으로 해임하고, 7사단장 유재흥 준장을 의정부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 2사단도 통합 지휘케 했다. 적의 서울침공을 바로 눈앞에 두고 일어난 불행한 일이었다.
한편 포천 방면 전투에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의 출전을 빼놓을 수 없다. 이때 육사는 생도1기(10기)가 1년 과정의 교육과정이 거의 끝나 졸업을 2주일 앞두고 있었고, 4년 과정의 첫 생도인 2기는 입교한지 불과 25일로 M-l소총 과정을 겨우 마치고 있었다. 육사생의 실전투입은 나중에 많은 논란을 가져왔지만, 여하간 참모총장의 명령으로 1기생은 분대장·반장이 되고 2기생은 대원이 되어 1개 전투대대를 편성, 포천에 투입됐다. 육사 교관으로 있다가 중대장이 되어 포천에 출동했던 이원엽 대위(현 국회의원·47)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희생 많았던 육사 생도대>
『나는 1백여명의 생도를 데리고 포천 쪽으로 급행, 부평리에서 이날 밤새껏 호를 팠습니다. 이때 부대편성을 보면, 도합 3백여명의 대대병력, 총지휘관에 조암 중령, 부대대장에 손관도소령, 제1중대장 송인률 대위, 제2중대장 박응규 소령, 3중대장이 나고 작전주임이 이승우 대위였읍니다. 26일 새벽이 되니까, 박격 포격에 이어 적이 능선으로 까맣게 기어와요. 적은 우리 옆에 있던 1인당 탄알이 10발밖에 없는 경찰대대를 우선 유린하고, 우리에게 덤벼들었는데, 일제 사격으로 처음에는 적1개 중대를 격퇴했습니다. 적은 일단 주춤했다가 압도적인 화력으로 공격을 재개하여 부득이 분산 후퇴했지요.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김홍래 하사가 박격포를 둘이나 안고 적을 쏘아대며 분투하던 모습입니다. 그리고 대대장인 조암 중령이 전선을 무단이탈, 적 수중에 들어갔다가 다시 우리 전선으로 넘어왔지만, 이적행위가 판명되어 총살형을 받았지요.』

<적 포화에 1연대장 전사>
이 전투와 그후의 후퇴작전에서 육사1기생은 2백62명 중 70명이 전사 혹은 실종됐고 2기생은 2백27명 중 82명이 전사 혹은 행방불명이 되어 27%의 많은 인원손실을 보았다.
의정부의 상실로 서울북방에서의 아군의 조직적 저항은 끝난거나 다름없었다.
창동 저지선에서 적을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무너진 둑이었다. 여기서 개전 초에 동두천에서 용전, 적 침공을 한때나마 저지했던 7사단 재1연대장 함준호 대령(준장추서)이 적 탱크포화를 맞고 27일 아침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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