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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가장 길었던 3일>(20)「6·25」20주…3천여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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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강 유역 이북의 한국군의 조직적 저항은 대체로 28일 상오 2시30분 다리폭파와 함께 끝났다. 적 침공 개시 이래만 3일밖에 지탱하지 못한 샘이다.「T·R·페런바크」저「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을 보면 25일 아침의 한국 육군 본부 인사 기록「카드」애는 분명히 9만8천명이 올라있었는데 28일 한강 남쪽에서는 불과 2만2천명밖에 확인할 수 없었다고 기술돼 있다. 며칠 후는 춘천지구에서 후퇴한 6사단과 동해안의 강릉에서 철수한 8사단 병력을 합하여 도합 5만4천명이 되기는 했다. 누가 보아도 한국군은 단지 전술적인 후퇴가 아니라 패배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1사단 행주서 오폭 받아>
2차「블레어·하우스」결정에 따라 27일 하오부터 미 해·공군이 한국군 지원 차 출동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었다.
또한 이때까지만 해도 자기 거류민 철수 엄호에 손이 얽매어 한국군을 제대로 지원할 수 없었다. 더우기 전선이 확연하지 않기 때문에 후퇴하는 한국군을 오폭하는 불상사도 있었다. 한국전쟁을 통해 본의 아닌 이런 오폭 사건은 적지 않았지만 첫 오폭 세례는 행주나루터로 도강 후퇴하는 백선엽 대령지휘하의 제1사단이 받았다. 그러나 이때 백사단장은 참모들에게 『이제 미국 참전이 확실해졌다』고 말하면서 마음을 놓았다.
근 10만 명의 국군이 북괴군의 제1격으로 전력을 잃고 만3일만에 무너진 원인으로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다.
우선 병력과 장비의 열세, 지휘계통의 혼란보다 높은 차원의 정치 및 군사정책미비와 만심을 찌른 적의 기습, 미국의 대한정책의 진공 등등의 요인이 겹쳐서 그런 비극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원인은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이제부터는 실제로 한국군방위선이 어떻게 뚫렸으며 국군은 어떻게 싸웠는가를 내외자료와 전투에 직접 참가한 증인 회견 담을 통해 대충 살펴보기로 하겠다.
옹진반도에 포진한 육본직속의 제 17, 독립연대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25일 상오4시부터 적의 공격을 받았다. 북괴군 6사단 14연대와 38선 경비 제3여단의 1만여 병력이 정석대로 처음에는 맹렬한 폭격으로 시작하여 보병의 공격이 뒤따랐다. 병력이 적의 3분의1인 2천7백명 밖에 안된데다가 부리한 지형이 배수의 진을 친 17연대는 곧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17연대장 백인봉 대령(현 인천선인 학원 이사장·51)은 그때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다.

<옹진엔 만여 괴뢰군 공격>
『내 연대 전면에는 22일부터 적이 집결하기 시작해서 곧 이를 육본에 보고했고, 23일에도 경고보고를 냈어요. 23일에는 적의 이동 상황이 육안으로도 똑똑히 볼 수 있겠더군요. 근래서 인접 지역의 적정을 알려달라고, 옆에 있는 형사단(주=백선엽 대령의 제1사단)에 무전을 쳤는데 아무 회보도 없었어요.
25일 상오4시경부터 적 폭격을 받았는데 7시쯤 전면공세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때 우리 연대에 5명의 미 군사 고문이 배속돼있었는데 이들의 철수가 문제란 말이에요.
마침 고문단 본부와 연락이 되어 L-5연락기로 이날 12시까지는 모두 서울로 보냈습니다. 이 방면의 적 주공은 먼저 연대정면좌측의 제1대대한데로 왔어요. 어어 우측의 3대대도 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곤가 들어왔고요. 8시에는 연대 본부에도 적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했읍니다. 압도적인 적세에도 불구하고 17연대는 정말 잘 싸웠읍니다. 그런데 이날 오후가 되니까, 벌써 탄약이 바닥이 났어요. 그래서 우선 제2대대가 이미 적이 침투한 옹진 시내를 강행 돌파해서 사관을 통해 퇴로를 찾았지요. 약4백명의 이 부대는 연평 도를 거쳐 인천으로 철수했읍니다.

<17연대는 두 갈래로 철수>
거두절미하고 우측의 제3대대와 잔존 부대도 25일 낮부터 적「탱크」와 폭격 때문에 밀리기 시작했어요. 문제는 해상으로부터의 철수를 어떻게 성공시키느냐였는데 25일 저녁에 육본에서 LST2척과 소형 연락선 2척을 보내왔어요. 옹진우도의 부포가 일직의「덩케르크」축소판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 25일 밤에 양동 작전을 했읍니다.
증원부대가 대거 상륙한 것처럼 1백여대의「트럭」을「헤들라이트」를 화차 켜 가지고 부 포항서부터 전선까지 밤새껏 왕래시켰지요. 방열한 아군포로 엄호포격도 하구요. 그래 그런지 적은 이날 밤 공격 못 해왔습니다. 26일 새벽부터 주력은 철수를 시작했지요. 17연대병력의 70%는 개인 장비와 함께 무사히 철수시켰읍니다. 중장비와「트럭」은 부 포항에서 모조리 소각, 혹은 바다에 쓸어 넣었읍니다. LST가 간조관계로 부두에 닿지 못한데 다가 그냥 버리고 가면, 적이 이용하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17연대는 부포와 사관 두 갈래로 철수한 셈이지요. 옹진반도에서는 적이 전리품은 하나도 못얻었읍니다.

<백대령 등 조각배로 철수>
나는 LST에는 타지 않고 포병대장 박정호 소령(군 우리 전투서 전사), 헌병대장 한승령 소령과 남았어요. 옹진반도를 하루밖에 확보 못한 책임을 지고 자결하려고 했지요. 결국 두 사람의 만류로, 박 소령이 바다 위에 떠있는 조각배를 끌고 와 셋이 타고 27일에 연평 도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신성모 국방장관 특명으로 파견한 해군 경비정(함명수 소령)을 기적적으로 만나, 당진으로 철수했다가 수원으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17연대를 수습해 보니까, 내 기억으로는 전사28명에 실종 2백85명이었읍니다.』

<아쉬웠던 중장비철수 계획>
그러니까 옹진반도는 단 하룻 만에 적에 유린된 셈이다. 원래 이곳은 지형이 방위하기가 극히 곤란하므로 육본에서도 전면전이 터질 경우는 제2안으로 미리 철수할 계획을 짜놓고 있었다.
현지에 있던 미군사고문관=「프랭크·브라운」중령은 적침 개시 두 시간 만인 상오 6시에 「KMAG」본부에『17연대는 적의 강력한 공격에 부닥쳐 전선의 유지가 곤란하다』고 보고하고있다.
이 연대가 육본 직속 탓도 있겠지만, 25일 군 수뢰가 그 북새통에서도 철수용 LST2척을 부 포항에 보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17연대는「옥쇄」의 운명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사실이 있다면 이왕 철수계획을 세울 바엔 1백5㎜포를 비롯한 중장비 철수계획도 치밀하게 짜두었더라면 하는 점이다. 백인엽 연대장의 회고대로, 적의 사용을 막기 위해 그것을 전부 소각 혹은 해중에 처넣은 것은 차선책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옹진반도전투와 관련해서 38이북서 넘어온「월남동포」는 물론 온 국민을 열광케 한「국군 해주 시에 돌입」의 오보 경위를 증인을 통해 살펴보자.
▲최기덕씨(당시 태양신문 종군기자·현광고업·51)
『24일에 옹진에 종군 나갔다가 25일에 그곳에서 적 침을 맞은 셈이지요.
새벽에 포 소리가 들려오는데 종전의 산발적 충돌 때의 박격포소리와 달라요. 중포 소리란 말이에요. 그래서 8시30분경에 연대본부로 가서 백인엽 대령을 만났더니, 「전면 전쟁 같다」고 그래요. 그러면서「무주를 향해 진격하겠다」고 해요. 아다시피 옹진은 38선 관계로 육지와 차단되어 교통도 해로 밖에 없습니다. 이 연대방위의 폭이 57㎞나 되는데 이것은 누가 보아도 방위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육본에서도 최악의 경우 제2안으로 철수계획도 짜놨었지요. 그런데 해주로 진격한다고 하기에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육본서 옹진 철수 명령>
내심 지휘관으로서 그만한 사기는 있어야겠지 생각하고 헤어졌지요. 귀로에 하오 2시쯤에 우현 고개에서 제3대대장 오익경 소령을 만났더니, 육본에서 벌써 후퇴 명령이 내렸다는 겁니다.
서울에 돌아와서 25일 저녁에 국방부 정훈국에 들렀는데 보도 과장 김현수 대령(28일 새벽 방송국 앞에서 전사)이 그쪽 전황이 어떻더냐고 물어요. 「육본에서 후퇴 명령은 내린 것 같은데 백인엽 연대장의 사기는 해주로 진격한다고 할 정도였소」라고 대답했지요. 나중에야 내이야기가 그렇게 과장되어 와전 된 것을 알고 깜짝 놀랐읍니다.』
김현주 보도과장은 최 기자의 이 말만을 근거로 국방부 보도과 발표의 종합 전황 속에 「국군 해주시 돌입」을 삽입했다. 물론 이 발표는 KBS를 통해서도 널리 보도되었다. 보도과의 이와 같은 발표를 듣고, 육본 자체도 발칵 뒤집혔다. 철수명령을 내렸는데 배진 하곤 있다니까.

<육본도 보도과 발표에 놀라>
당시의 정보국차장 김점곤 중령(현 경희대교수·47)은『17연대와 아무리 무전교신을 하려고 해도 안되고 결국「KMAG」에서 연락이 왔는데 철수했다는 겁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김현말 대령이 어떤 이유로 이런 엄청난 「대전과」를 보도하게 되었는가는 본인이 그후 이틀만에 전사했기 때문에 알 길이 없다.
국민의 사기를 북돋우려는 궁여지책이었음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보도가 그후에 전체국민에게 큰 실망을 주고 군 발표에 대해 부신을 초래한 것은 틀림없었다.
특히 앞서도 잠깐 말했지만 38선을 넘어온 수백 만월 남 동포들은 이 발표를 보고 이제 고향으로 가게됐다고 성급하게 짐을 꾸린 사람도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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