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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가장 길었던 3일(18)|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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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국 시간으로 25일에 트루먼 행정부나 유엔이 취한 조치에는 북괴군에 대해 어떤 군사적 제재를 가하는 결정은 포함돼 있지 않았다. 제1 회 블레어·하우스 회의에서는 다만 한국에 있는 2천여 미국인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미 해·공군을 사용할 것과 한국군에 10일분의 탄약을 긴급 수송하는 결정만을 취했을 뿐이었다. 한편 유엔 조치는 북괴군에 정전과 38선 원위치로 돌아가라는 것을 요구한데 그쳤다. 이때 이미 적군은 의정부에 들어온 뒤였다(26일하오).
그러나 실지로 미군과 북괴군의 교전은 공중이기는 하지만 27일 아침에 벌어졌다. 미국인철수를 엄호하던 미 공군기가 인천상공에서 북괴공군 야크기 3대를, 그리고 이보다 몇 시간 후에 김포상공에서 4대를 각각 격추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인 철수 작전 때 발생한 부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2차 회의에서 군사개입 결정>
미국이 공식으로 한국군지원을 위해 우선 해·공군을 투입하기로 한 결정은 26일의 제2차 블레어·하우스 회의에서 이루어졌다.
트루먼 대통령은 그의 자서전(Memoirs by Harry S.Truman)에서 그 경위를 이렇게 다루고 있다. 『26일(미국시간)에 한국으로부터 들어온 보고는 모두 암담한 것이었다. 여러 통의 메시지가 나에게 왔는데 그중 가장 관심을 끈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승만 대통령의 원조호소 전문이었다.
6월25일 이른 아침부터 북괴는 한국에 대해 무력침략을 시작했습니다 각하와 미국 국회의원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 한국인들은 오늘날과 같은 변란이 있을 것을 예견하여 극동에서 민주 보루를 공고히 하고 아울러 세계 평화에 기여하려는 목적에서 강력한 국방력을 길러왔습니다. 본인은 다시 한번 우리를 해방시켜주고 우리 공화국을 세우는데 있어 각하가 베풀어주신 원조에 감사하는 바입니다.
이런 인가위기에 처해 우리가 용감히 싸우는 이 마당에 있어 본인은 각하의 보다 더 많은 도움과 아울러 이러한 세계평화 파괴의 행동을 방비하기 위해 효율적이며 시기에 적절한 원조를 제공해 줄 것을 호소하는 바입니다.

<트루먼, 장면대사를 위로>
장면대사가 26일 하오 3시50분에 직접 이 대통령이 이 전문을 나에게 가져왔는데 그는 어지나 풀이 죽었는지 거의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 나는 이런 말로 장면대사를 위로 격려했다(주=장 대사는 이보다 앞서 러스크 국무차관대리와 잠시 만났음).
전투가 시작한지 48시간밖에 되지 않지 않습니까. 역사를 보건대 다른 나라 사람들은 더 절망적인 정세에서도 자유를 수호하고 궁극적인 승리를 얻은 경우가 있습니다. 기운을 내십시오. 이제 원조가 갑니다.(주=이 자리에서 해·공군 투입 언질은 주지 않았음).
월요일(한국 시간 27일)하루 종일 한국사태는 자꾸 나빠져 갔다. 희망적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미국 시간으로 26일의 워싱턴 표정을 글렌·D·페이지 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에 대한 결정(The Korean De-cision)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정부안 이건 밖이건 간에 여러 지각 있는 미국 사람들은 미국이 한국에 대해 얼마간의 무기 원조 외에는 다른 조치를 취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전략적 가치 없다는 주장도>
정통한 관리들은 기자들에게 사적으로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적기 때문에 결국 한국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저녁 무렵에는 워싱턴 시내 공기는 행정부가 갑자기 밀어닥친 위기에 대처할만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할 것이라는데 기울어지고 있었다. 여러 당국자와 회견한 뉴요크·타임즈의 제임즈·레스턴 기자까지도 다대수의 관리들은 시간과 장소가 서방측보다도 공산 측이 훨씬 더 유리한 한국에서 전쟁에 말려 들어가는 것은 슬기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 시의 분위기는 음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24시간 전에 블레어·하우스에서 대통령과 회동했던 13명의 미 고관들 머리에는 아무런 의혹이나 좌절감도 없었다. 결정은 분명할 테니까.
실제로 이날 아침 셔먼 해군 참모 총장은 임지로 돌아가는 아더·D·스트루불 7함대사령관에게 미군은 틀림없이 한국에 개입하게된다 고 귀띔해주었다.』

<대통령 측근자만이 개인확신>
그럼 다시 트루먼 자서전으로 돌아가 미 해·공군투입 결정내막을 알아보자. 『나는 26일 하오 9시에 어젯밤에 이어 두 번째로 블레어·하우스 회의를 소집했다.
멤버는 유엔 관계로 바쁜 러스크 차관대리 대신 매슈스 국무차관보가 참석했을 뿐 1차 회의와 같은 13명이었다.
한국이 이제 패망 일보직전에 처해 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분명했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베를린에서 발생한 것 같은 것이 한층 더 대규모로 전개 된 것이다(주=1948년의 소련에 의한 서부 베를린 봉쇄). 공산주의자들은 약한 지점을 탐색하고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3차대전이 유발될 것이 틀림없다. 이때 맥아더 원수로부터 다음과 같은 급보가 들어왔다.
북괴군 탱크는 서울 교외에 침공하고 있음…. 본 사령부에서 파견한 처치 준장의 군사시찰단은 서울이 위험하므로 수원에 착륙했음. 한국군은 북괴군의 단호한 공격에 저항 못하고 있음….
본 사령부의 경세판단에 의하면 한국군의 전면붕괴는 목전에 다다르고 있음. 이상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비상전화로 맥 원수에 하명>
나는 존슨 국방장관에게 비상전화로 곧 맥아더 원수에게 내 명령을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미 극동사령관 휘하의 해·공군을 한국군 지원을 위해 사용하라. 단 38선이 남에 국한할 것.
27일 새벽 유엔 한 위로부터도 북괴의 침공은 충분히 계획 준비된 전면적 규모의 것이다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나는 이날아침 상·하원지도자들을 불러서 상황을 실명하고 전국에 발표될 내 성명내용에 대해 찬동을 얻었다. 정오에 나는 전국민에게 성명을 발표했다.
본인은 미합중국 해·공군에 대해 한국군에 엄호와 지원을 제공하드록 명령했다. 한국에 대한 공격은 틀림없이 공산주의자들이 독립국을 정복함에 있어 정부전복의 수단을 사용하는 단계를 넘어서 이제 무력침략과 전쟁의 수단을 사용하고자 한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본인은 유엔안보리 미국 대표 오스린 대사에게 이 조치를 유엔에 보고하도록 훈령했다.
일반 여론이나 국회가 내 결정에 지지를 표명한 것을 보고 매우 기쁘고 마음 든든했다.』
한편 유엔 안보이사회의 제2차 회의는 트루먼 대통령의 중대결정 발표후인 27일 하오3시에 개최되었다. 이 극적인 회의를 보려고 수천 명의 방청객이 쇄도했는데 1천2백 명만이 인상하고 나머지 5천 명은 좌석관계로 되돌아갔다.

<2차 안보리회의 방청객 쇄도>
소련대표 말리크는 여전히 불참이었다. 이 보다 앞서 20여명의 모모한 유엔 대표가 모인 오찬회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말리크도 나와 있었다.
리 사무총장이 말리크에게 오늘 하오화의에 참석하겠느냐고 물었다.
안나가겠다는 대답이었다. 옆에 있던 그로스 미 대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개회벽두에 유엔안보리 미 대표 오스틴이 한국사태에 관계된 경세를 소상히 설명했다. 골자는 북괴가 6월25일에 채택된 유엔 안보리결의를 무시하고 계속남침하고 있으므로 이제는 유엔에서 군사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오스틴 대표 연설 후 다시 장면대사가 한국을 구하기 위해 안보리에서 효과적인 조치를 취해주도록 호소했다. 그후 각국 대표가 각각 자기 정부 견해를 피력했는데 특히 유고는 정전과 유엔의 중재, 그리고 북괴대표의 유엔 초청을 골자로 하는 대안을 내놓아 파란을 일으켰으나 끝내 묵살되고 말았다.
개회 8시간이 훨씬 넘은 밤 11시45분에 가서야 북괴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세계 평화와 한국에 있어서의 안전보장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하도록 권고하는 내용의 미국결의안 이 7대1 기권2로 채택되었다. 반대는 유고고, 기권은 인도와 애급이었다.(주=인도는 이때 본국 정부 훈령 미착으로 기권했으나, 30일 회의에서 지지를 표명).

<유엔 트루먼 결정을 추인>
안보리사회에서 미결의안이 채택될 때 한국의 수도 서울은 이미 북괴군이 완전히 점령한 후였다(한국시간 28일 상오 11시30분). 트루먼 대통령의 해·공군투입결점으로 미 극동 공군의 F-80 제트기와 B-26경폭격기가 출격했지만, 침공을 막기에는 적의 병력이 너무도 압도적이었다.
6월27일 밤의 안보리사회 결의로 트루먼 대통령이 이미 발동한 미국의 군사적 조치는 유엔에 의해 정식으로 추인 되는 결과가 되었다. 이 결의도 소련 불참으로 성립됐다.
그러나 소련이 나와 거행 권을 행사했다하더라도, 미국은 단독으로 출병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트루먼 대통령은 안보리의 결의 보다 20시간이나 앞서 비록 해·공군만의 투입이기는 하지만 군사 행동을 명령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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