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서소문 포럼

김정은에게 삼성핸드폰이 원망스러운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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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남정호
SUNDAY 국제선임기자

19세기 말 발명된 기관총은 민중항쟁의 본질을 바꿨다. 순식간에 수백 발을 갈겨대는 진압군과 몽둥이·곡괭이, 잘해야 사냥총으로 무장한 민중 간 폭력의 격차가 너무 커진 거다. 군부의 변심이나 외세의 도움 없이 시위대가 정부를 전복시키는 건 불가능해졌다. 분노한 파리 시민들이 부패한 루이 16세 정부를 멋지게 때려 엎던 혁명의 시대는 종언을 고한 셈이다.

 21세기 테크놀로지는 또 한번 민중항쟁을 변화시킨다. 지난해 방한한 알렉 로스 미국 국무부 수석보좌관은 이 시대 민중항쟁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했다. “과거와는 달리 리더가 없이도 대규모 폭력 시위가 가능하다”고. 바로 인터넷과 페이스북·트위터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힘이다. 누구든 궐기를 부르짖으며 언제, 어디서 만나자고 제안할 수 있다. 여기에 다수가 동조하면 그걸로 끝이다.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시작된 반독재 시위가 알제리·이집트 등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던 ‘아랍의 봄’이 딱 그랬다.

 아랍의 봄을 이끌어낸 SNS는 요즘 모바일이 대세다. 페이스북에 PC 대신 핸드폰·태블릿으로 접속하는 비율이 전 세계적으로 71%에 달한다.

 한국의 전 세계적 히트작인 핸드폰. 중동에서라고 인기 없을 리 없다. 삼성의 이 지역 점유율은 44%, LG폰까지 합치면 중동인의 절반 이상이 한국산 핸드폰을 쓰는 셈이다. 중동의 반독재 투사들이 한국산 핸드폰의 성능에 힘입어 싸우고 있단 얘기다.

 핸드폰이 리더를 대신하면 독재정권은 더 힘들어진다. 옛날 같으면 탄압이든, 회유든, 시위 주모자만 잘 통제하면 민중항쟁을 막을 수 있었지만 이젠 불가능해진 탓이다.

15일 이후 800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이집트 유혈사태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시리아·이라크의 불안도 갈수록 심각하다. 이런 중동 사태는 한국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껏 기름값 좀 올리는, 강 건너 불인가. 결코 아니다. 작금의 한국 외교에서 절실한 미국의 역량을 중동이 빨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미국 외교의 관심이 온통 중동으로 쏠리는 느낌이다. 지난 2011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천명했던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 선언이 무색할 지경이다. 아시아 무시는 존 케리 국무장관의 행적에서 단박에 드러난다. 지난 2월 취임한 케리는 그간 12번 해외 순방을 했다. 그중 동아시아를 찾은 건 지난 4월 단 한 번. 하나 중동엔 여섯 번이나 갔다. 케리의 중동 편향성엔 미 언론도 비판적이다. “고질적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 매달려 중요한 아시아를 외면한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게다가 오바마의 최측근 참모인 국가안보보좌관 수전 라이스는 자메이카계 흑인으로 아프리카 전문가다. 워싱턴에선 “라이스가 아시아보다 중동은 물론 아프리카마저 더 중시한다”는 이야기가 돈다.

 현재 한국 외교는 두 개의 큰 짐을 지고 있다. 남북한 긴장 해소와 일본의 우경화 저지가 그것이다. 싫든 좋든 미국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한 일들이다. 그럼에도 북한 문제의 경우 미국의 소극적 태도로 6자회담이 겉돌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원하는 북한으로서는 ‘잊혀진 여인’으로 전락한 처지가 답답하기 그지없을 게다.

 고삐 풀린 아베 정권의 우경화를 막는 덴 미국 입김이 특효약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대표적인 친미주의자로 알려져 있어 미 정부의 요구를 무시하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실종된 미국의 관심을 어떻게 돌릴 수 있나. 미 한반도 전문가 사이에선 “지금이야말로 북한이 핵실험을 할 때”라는 농담이 돈다고 하지만 그래선 안 될 일이다. 현재로선 미 정·관계 인사를 끊임없이 접촉해 한반도의 중요성을 이해시키는 돌직구가 유일한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7일 방한한 로버츠 메넨데즈 미 상원 외교위원장 같은 중진을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게 긴요하다. 메넨데즈의 지역구는 한인이 많은 뉴저지 다. 특히 그는 “아베 총리는 앞을 내다보지 못하며 일본이 지역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려면 미래지향적인 시야가 필요하다”고 일갈한 인물 아닌가. 답답한 국면을 반전시킬 대한민국 국가대표 돌직구 투수의 등판을 기대한다.

남정호 SUNDAY 국제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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