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터키 '돈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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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미국이 이라크전에 앞서 터키와 '돈 전쟁'을 벌이고 있다. 터키를 대 이라크 공격의 발진기지로 삼을 계획인 미국이 군사기지 사용료를 놓고 터키와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는 19일 터키 정부가 지난 17일 로버트 피어슨 터키 주재 미국대사를 불러 군사기지 제공 조건으로 3백20억달러(약 38조원)를 최종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이미 지난 주말 워싱턴을 방문한 터키 관리들에게 2백60억달러가 상한이라고 못박았었다. 양국은 이후 계속 절충을 했지만 19일까지도 합의를 보지 못했다.

이라크로부터 공격받을 위험이 크고, 전후에도 이라크와의 관계악화로 큰 손해가 예상되며, 유럽 국가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면서까지 미국에 협조하는 대가가 이 정도는 돼야 한다고 터키 정부는 주장하고 있다.

더구나 터키 국민의 대다수는 전쟁에 반대하고 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20일 터키의 요구액이 한때 9백20억달러에 달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터키 정부와 의회는 지난 17일 미군 주둔을 허용하는 안을 승인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원조 액수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처리를 미루기로 방침을 바꿨다.

터키에 4만명 정도의 군대를 투입해 이라크 북부를 친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는 미국은 2백60억달러 이상은 안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 가운데 60억달러는 무상원조고, 나머지 2백억달러는 터키가 해외에서 차관을 빌려 쓸 때 미국이 보증을 서주겠다는 것이다.

두 나라는 특히 무상원조 규모를 놓고 의견충돌을 빚고 있다. 터키가 1백억달러를 요구하는 반면 미국은 60억달러면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백악관은 19일 터키에 "주말까지 결정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를 찾아볼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외교 전문가들은 그러나 양측이 어떻게든 합의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이 터키 외에 다른 대안을 찾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하고, 터키가 이 거래를 포기하기엔 이미 확보한 2백60억달러라는 돈이 너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은 터키는 미국의 지원이 절실한 상태다.

미국이 터키에 집착하는 것은 여기서 공격하는 것이 전쟁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지난주 미국은 거세게 반대하는 독일.프랑스.벨기에를 간신히 달래 이라크가 터키를 공격할 경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나서도록 정지작업까지 마쳐 놓았다.

터키가 군사기지 제공을 끝내 거부할 경우 미 국방부는 상황이 매우 복잡해질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공수부대를 이라크 북부지역에 침투시켜 전진기지를 구축하는 대안을 마련해 놓고 있다고 뉴욕 타임스는 20일 전했다.

뉴욕=심상복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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