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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5)|여석기<고대교수·영문학>|광대에서「스타」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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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유명한 독일의 연극학자「율리우스·바브」가 쓴『연극 사회학』이란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서양에서는 원래 어릿꽝대,「서커스」꾼, 배우등은 미풍양속의 견지에서 존경의 바깥에 있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 권리조차도 주어지지 못했다. 이점을 놀랄 만큼 훌륭히 나타낸 것은「스위스」법전의 아래와 같은 조문이다. 즉 연예인에게 위해를 가한자는 햇볕이 쬐는 벽 있는 곳으로 끌려간다. 그러면 피해자인 연예인은 그자의 벽위의 그림자의 목을 눌러줄 권리를 갖고 있다고, 이것이 연예인이 갖는 만족의 전부인 것이다.』
이러한 배우들에 대한 사회적 천시는 물론 서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동양각국에서도 전통적으로 볼 수 있었던 현상이며 우리나라에서 재인·광대·사당패 또는 신연극 이후의「딴따라」등등의 명칭은 모조리 계급적 멸시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배우의 별칭이「강변의 거지」(하원걸식)였던 것을 보면 자명하다.
「셰익스피어」가 활동하던 영국의「엘리자베드」시대만 하더라도 일부의 지방순회 극단은 주거부정의 부랑배 노상강도와 한데 묶어서 법률의 보호밖의 존재로 규정받는 일이 예사이었다.
아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고전 희랍시대의 연극인들은 도시국가의 존경과 보호를 받은 어엿한 존재였지만 그것은 오히려 예외였고「로마」전성기의 직업적 배우는 시민권을 박탈당했고 원로원의원의 삼대손과도 혼인을 못하게끔 법으로 규제되어 있었다 한다.
그리고 그 시기에 처음으로 여배우가 출현하게 되는데 이들은 창녀와 거의 구별되지 못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하긴「로마」가「유럽」역사상 보기 드물 정도의 찬란한 문명을 이룩했고 그들이 건립한 극장은 지금 남아 있는 유적으로 짐작해 보아도 웅장하고 사치스럽기 한량이 없는 것이었지만 거기서 공연된 내용은 호색, 음탕, 선정, 눈요깃거리등의 지나친 대중오락적 요소가 강하여 거의 문학적 내용을 담지 목하고 있는데 이런 현상은 강대하고 부유한 국가가 내부적으로 안고있었던 정신적 퇴폐를 단적으로 반영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왜나면 대체로 한민족이나 국가가 가장 활력과 패기에 차있을 때 연극이 흥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드」1세 여왕때의 영국이 그랬고「루이」14세 왕조의「프랑스」가 그랬고「스페인」의 황금시대나「르네상스」이태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원전 5세기의「아테네」도시국가가 그랬다. 연극이 진실로 사회를 반영한다는 뜻도 바로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한다.
아뭏든 배우의 사회적 위치가 개선된 것은 근세이후의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18∼19세기의「유럽」은 극작가보다도 명배우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처음 궁정귀족의 비호를 입었고 이어서「부르좌」시민의 갈채를 받았다. 특히 근대적 시민사회가 개화된 이후로 사회적·경제적 지위가 안정되어 유행의 첨단과 세련의 극치를 이루는「스타」적 존재가 되었으며 일부는 귀족 또는 지명인사의 부인으로 「출세」라는 행운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대를 이어가면서 배우노릇을 하는 소위 이원의 명문을 형성하기에 이르는데 이런 현상은 근세「유럽」뿐만 아니라 일본 같은 데서도 볼 수 있다. 배우의 예술이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덧없기 한량이 없지만 일단 성공하는 날에는 당대의 영화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사람이 성좌에 비유되는 것은 배우와 군인의 경우 밖에 없다. 그러나 군인은 별이라도 달고있으니 별문제라 친다면 광대에서「스타」에 이르는 사회적 변천의 과정은 놀랄만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전통적으로 연예인을 대하는 계급적 멸시감이 완전히 씻어졌다고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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