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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양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최근에 어린이 웅변대회가 있었다. 모두들 깜찍스러울이 만큼 잘했다. 어른들을 뺨칠 정도로 모두 능했다.
그러나 잘했다는 것은 어른들의 기준에 의해서 그렇다는 것. 어떤 어린이는 그「제스처」며, 말투가 꼭 선거연설을 하는 국회의원 입후보자들의 그것을 닮았다. 서양에서도 어린이들의「스피치·콘테스트」는 있다. 그러나 이때의 심사기준은 어린이다운 세계의 얘기를 어린이답게 잘 얘기하느냐 못하느냐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럼「웅변」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얼핏보면 우리나라에선 어느 어린이가 더 어른의 흉내를 잘 내느냐를 가리기 위한 웅변대회인 것 같기만 하다.
그리고 어른들이 이런 것에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고 있는 동안, 어느 사이엔가 그들은 어린이들을 동심의 세계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학예회나「텔리비젼」에 나오는 어린이들은 모두 짙은 화장을 시켜 고운 어린이의 얼굴을 가려 놓는다. 어린이들 앞에서 함부로 말하는 어른들에 젖어 학교선생의 너절한 입성을 흉보는 어린이들이 있다.
이래서 우리네 주번에서는「애어른」들만이 늘어난다. 사실『사람 웃기네』하며 어른들에게 대꾸하는 어린이들의 태연한 표정은 어린이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어린이가 동심을 잃어가는 것을 혹은 성장이라고 기뻐하는 어른들은 없는지 염려가 된다.
모든 어린이는 신이 아직 인간에게 절망하지 않고 있다는「메시지」를 갖고 태어난다. 이것은「타고르」가 한 말이다.
어린이는 매일같이 사랑과 희망과 평화를 전도하기 위하여 신이 보낸 사도들이라고 「로웰」이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런「메시지」들을 어른들은 또 다시 매일같이 더럽혀 놓고만 있는 것 같다.
어린이에겐 비평보다 본보기가 필요하지만, 우리네 어린이에겐 비평은 많아도 본보기는 드물다.
우리네 어린이에겐 놀이터가 없다. 웃음도 없다. 그래서『사람 웃긴다』는 비뚤어진 웃음만이 나온다. 아무래도 요새 어른의 세계는「앙팡· 테리블」들만을 키워나가고 있는 것만 같다.
5월5일 우리는 또 다시 어린이의 날을 맞이하지만 어린이의 양지는 해마다 비좁아만 가는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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