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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2)|OX식교육의 가치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서울에 있는 C국민교에서 어린이 회장선거가 있었다. 신입생 직선제로 돼 있기 때문에 회장후보들은 4, 5, 6학년생을 모아놓고 합동정견(?) 발표회를 열었다. 후보들의 조리있고 유창한 발표에 이어 급우들의 찬조연설까지 곁들였다. 요란한 선거「포스터」가 붙은 뒷자리에서 지켜보던 교사는 국회의원선거와 똑같은 순서라고 말하며 씁쓸한 표정만 지었다.『요즘 아동들은 말솜씨로 치면 우리선생들도 놀랄 정도입니다.』교단에서 30여년을 보낸 한 교사의 말이다.「우리가 자랄 때」의 어린이로 생각하가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들의 이 능숙한「말솜씨」를 그러나 막상 종이에 옮겨 놓으라고 하면 또 한번 선생님을 놀라게 한다.
국민교 상급생들중에서도 문장의 연결조차 할 줄 모르는 아동이 많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표현력은 틀에 박힌 것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교사들은 안타까와 하고 있다.
이들에겐『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유의물음은 통하지 않는다. 이런이런 것 중에서 고르라는 것 외엔 조금이라도 깊이 따지는 것은 이내 힘들고 귀찮은 것으로 돼 버린다.
선생님이 내어준 작문숙제를 받고 한 어린이는 다섯줄 동시를 들고 왔다. 문은 도대체 길고 복잡해서 짤막한 시로 해 왔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아가다가는 국민학교를 나와도 편지 한장 쓸 줄 모르게 되지 않겠느냐고 한숨짓는 교사도 있다.
한때 OX식 객관식 시험이 어린이들의 사익을 통조림처럼 틀에 넣어 창의력을 없애버린다고 문제가 된 적이 있다. 깊고 힘든 생각을 할 필요가 없이 외운것을 그저 맞춰 넣기만 하면 되는 이 객관식 시험제는 치열했던 중학입시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길 수 없이 유일무이한 교육방법으로 통했다.
유치원에서부터「좋은 학교」를 향한 연습이 행해지고 있었던 현실에서 모든 문제가 시험으로 연결되는 어린이들의 세계는 바로 그 시험의 방법처럼「OX식」의 한계를 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깊고 힘든 사고보다는 단순한 기분에 무엇이든 쉽게 처리해 버리려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고물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한다』고 서울 남대문교의 옥량호교사는 오늘날의 어린이들을 말한다.
그러나 옥교사는 이들 어린이가 무엇이든 눈치 있게 재빨리 처리하려하기 때문에 이기적이 되고 성격도 거칠어진다고 말한다.
『교육이 아무리 사회풍조에 영향 받는다해도 어린이들의 거칠은 모습을 볼 때 가슴 아프다』고 수송교 김태휴교감은 말하면서「전인교육」의 문제가 너무나 어렵다고 한다.
『한반에 70∼80명, 심한 곳은 백명이 넘는 아동을 놓고 개별지도는 꿈도 못 꾼다』고 옥교사는 선생이 책장사이로 돌아다닐 자리도 없는 한국의 현실을 이야기 한다.
설혹 시간이 있어 어린이들과 개인적으로 대할수 있다 손치더라도「과외」다「치맛바람」이다하는 사회의「말썽」들 때문에 교사쪽에서 오해가 두려워 개별지도를 회피하는 경우도 있다. 내일의 시민을 위해 스승으로서 순수한 입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동들 자신도 학교라는 곳을「오직 공부만 하는 곳」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중학입시가 없어지자 갑자기 학부형들의 발길이 끊어진 사실은 어린이들에게 이런 생각을 더욱 굳히자 하는 좋은 예이다. 학부형들부터가 학교를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다.
강당에서 학부형들의 흐뭇한 표정속에 전교생이 모여 학예회를 열었던 것은 옛 말이다. 콩나물 교실에 선생님 얼굴보기조차 힘든 학교가 많은데 강당을 비워 두고 있는 학교가 손꼽힐 정도로 드문 것이다.
『모여서 같이 의논하고 단체활동 하기가 힘들다』고, 그래서 원만한 한 인간을 교육해 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다정한 이웃」의 훈련도 할 수 없다고 교사들은 호소한다.
『어린이들이 자꾸 이기적이고 정서적으로 메말라간다고 하지만 이런 상황속에서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하는 어느 교사는 중학무시험제로 바뀐 오늘날 제일 우선해야 할 문제가 바로 정서교육이라고 주장한다.
그림 몇장 그리고 풍금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따위의 것 만이 아닌 근본적인 무엇이든 사랑을 갖고 바라볼 수 있는 정신의 여유와 가라앉은 태도, 누구든지 믿고 돕는 인간성의 교육이 사회의 뒷받침 없이 이루어질 수는 없겠지만,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베풀어져야 할 제일 급한 일이겠다. <윤호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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