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속의 구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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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요즘은 비교적 단속이 잘된 것 같은 느낌이지만, 얼마 전만해도 한가한 낮 시간에 시내「버스」를 타면 목적지까지 가는동안 평균한, 두 명의 소위「양아치의 똘마니」가 승차한다.
일부러 찢어 놓은 듯한 너풀거리는 옷을 걸치고 신도신지 않은 채 차를 타고는 콧소리에다 간신히 목에서 삐져 나오는 이상야릇한 목소리로『신사 숙녀, 아저씨 아줌마…』라는 언제나 들어도 똑같은 말을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한참 주워대고는 노래 한곡조를 불렀다.
그『신사 숙녀…』할 때만해도 덜 가슴이 졸이지만 그 노래를 부르려고 입을 벌릴 때마다 나는『제발 유행가가 아니었으면…』하고 속으로 은근히 기대해 보고 했다. 그러나 기껏해야 열살 안팎밖에 안나 보이는 어린것이 영락없이『섬마을 선생님』이나『동백아가씨』다.
변성도 안된 목소리로 목에 힘줄을 돋우고는 악을 쓰는 것이다.
자기의 노래를 들었으니 당연히 사례를 받는다는 표정으로 시꺼멓게 때가 낀 손을 내밀지만 그 손에 동전 한닢 주어본 적이 없다. 물론 인색한 탓이라고 들린다면 대꾸할 말이 없겠으나 사실상 내 본심은 그 손에 지폐 한장을 던져준다는 것은 곧 사회악을 조성해 주는 일임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꼬마「똘마니」를 내세워 무위도식하는 소위「왕초」의 존재는 값싼 동경을 허락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왕초가 좀 더 머리가 명석한 사람이라면 대중가요보다는 차라리 「찌리링」도 좋고「송아지」도 좋으니 그 아이에게 어울리는 동요를 가르쳐주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이런「양아치의 똘마니」대신 딱딱한 종이에서 서투른 글씨로 동정을 호소한 글을 승객수대로 하나씩 돌리고 연필을 파는 고학생이 눈에 띈다. 그 교복·교모·「배지」·명찰까지 단 고학생은 노래한 곡을 부르지 않는다 뿐이지「양아치」와 똑같은 억양으로 배움의 욕망을 늘어 놓는다. 그 비굴한 목소리….
왜 떳떳하게 어려움을 극복해나갈 생각을 못하고 값싼 동정만을 바라는가. 시장에 나가 「리어카」를 끌고 도로공사에 나가 돌을 깨는 모습이 그 ,구걸하는 모습보다는 훨씬 건강하고 아름다와 보일 것이다.
물론 그 어린아이나 고학생에게 책임을 돌린다든가 또는 그들 자체가 미워서가 아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에 분노를 느끼는데서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정복<서울 서대문구북아현동93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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