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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엔 안 그랬는데 지금은 감탄할 일이 없다고? 그래서 예술이 필요한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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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호 09면

1 에마뉴엘 드마르치-모타가 연출하고 엘로디 부셰가 출연한 오르바트(Horvath)의 작품 ‘카지미르와 카롤린(Casimir et Caroline)’. ⓒJean-Louis Fernandez
2 극단원들과 작업 중인 에마뉴엘 드마르치-모타. ⓒJean-Louis Fernandez

프랑스 문화의 정수가 대학로에 온다. ‘세계 공연예술계의 심장’이라 불리는 테아트르 드 라 빌(Théâtre de la Ville) 최초의 내한공연이 제13회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10월 2~26일)의 막을 여는 것. 현재 유럽 연극계에서 가장 핫한 인물로 꼽히는 이 극장의 예술감독 에마뉴엘 드마르치-모타(Emmanuel Demarcy-Mota·46)가 직접 연출하고,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유명 배우이자 패션계 거물 카를 라거펠트의 뮤즈로 알려진 엘로디 부셰(Elodie Bouchez·40)가 출연하는 화제작 ‘빅토르 혹은 권좌의 아이들’(Victor ou les Enfants au Pouvoir·10월 2~4일 아르코예술극장, 이하 ‘빅토르’)이다.

프랑스 대표 극장 ‘테아트르 드 라 빌’ 예술감독 드마르치-모타 e메일 인터뷰

파리 한복판에 19세기 세워진 유서 깊은 이 극장은 피터 브룩, 피나 바우쉬, 지리 킬리안 등 세계 거장들이 신작을 선보일 때 반드시 거쳐온 곳으로, 이곳의 연간 프로그램이 곧 세계 공연계 최신 흐름을 말해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컨템포러리 공연예술의 메카다.

게다가 이번 무대는 테아트르 드 라 빌 역사상 첫 아시아 투어다. 최근 레종 도뇌르 작위를 받은 프랑스 최고의 문화파워이자 대중적으로도 인기 높은 스타 에마뉴엘 드마르치-모타를 중앙SUNDAY가 e메일로 미리 만났다. 포르투갈 최남단에서 휴가를 보내며 9월에 있을 리스본 축제를 준비 중이라는 그는 첫 아시아 투어에 대한 기대감을 담은 무척 꼼꼼한 답변을 보내왔다.

3~6 내한 작품 ‘빅토르 혹은 권좌의 아이들’. 파리 초연 시 극찬받은 유명무대미술가 이브 콜레(Eves Collet)의 아름답고 장중한 무대세트가 그대로 재현된다. ⓒJean-Louis Fernandez

테아트르 드 라 빌은 현대무용의 전설 피나 바우쉬가 초연을 고집한 것으로 알려져 흔히 무용 전문극장으로 오인받지만 연극과 클래식, 월드뮤직 분야에서도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을 고루 소개하는 극장이다. 1968년 재개관 이후 45년 동안 극장장이 딱 두 차례 바뀐 안정적인 운영으로 유명한 이 극장에 2008년부터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3대 극장장이 에마뉴엘이다. 지난 5년간 멤버십 위주의 폐쇄적 티켓정책을 개선해 관객 저변을 확대하고 젊은 예술가들의 창작활동 지원, 차세대 교육프로그램 강화 등 기존의 명성을 넘어서는 도약의 발판을 구축했다. 특히 연극연출가 출신으로 직접 극단을 운영하면서 적극적인 해외투어를 통해 다양한 문화와의 충돌을 도모하고 있다. 이번 한국 투어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테아트르 드 라 빌 무대에 서길 원한다. 작품 선정의 기준이 뭔가.
“우리는 거장이건 신진이건 새로운 예술형식을 창조할 수 있는 예술가들을 원하고, 그들을 지원한다. 관객들이 새로운 창작물을 접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들의 동반자가 되어 창작과정을 돕고 같이 완성해 나갈 때 관객들도 예술가의 발전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질소와 산소를 발견한 라부아지에처럼 아무도 몰랐던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예술가를 찾는다’는 말을 했다.
“예술은 세상을 모방하려 하면 안 된다. 세상을 창조해야 한다. 예컨대 피나 바우쉬는 새로운 무용형식을 창조했다. 연극과 무용을 결합시키고, 다국적 예술가들이 소속된 단체를 만들어 국제적인 언어를 만들어냈다. 로버트 윌슨도 이미지로 작업하는 연극 형식을 창조했다. 연극은 글로 쓰인 대본만큼 이미지도 중요하다. 그는 연극이 이미지와 상상의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뉴질랜드 안무가 레미 포니파지오는 마오리 전통을 현 세계와 결합시켜 작업한다. 예술가는 과학자처럼 우리가 모르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의무가 있다.”

그는 ‘예술가의 역할과 자리’에 대해 고민한다고 했다. 예술가란 “감탄을 자아내는 일을 하기 때문”이란다. “어린이는 세상을 발견할 때 감탄한다. 개미가 기어가는 모습과 바다의 움직임,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매혹된다. 모르던 걸 깨닫기 때문이다. 감탄하면서 인간은 진보한다. 하지만 살면서 감탄하는 법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예술가의 역할이 필요한 이유다.”

7~8 ‘빅토르 혹은 권좌의 아이들’공연 중인 엘로디 부셰. ⓒJean-Louis Fernandez 9 ‘카지미르와 카롤린’에서 엘로디 부셰에게 연기지도 중인 에마뉴엘 드마르치-모타. ⓒJean-Louis Fernandez

10월에 첫 내한공연 … 최초의 아시아 투어
테아트르 드 라 빌은 전통적으로 티켓을 구하기가 힘들기로 유명했다. 회원제로 운영돼 레퍼토리가 발표되자마자 기존 회원들이 거장들의 유명 작품을 선점해 비회원들의 접근이 어려웠다. 에마뉴엘은 이 부분을 개선했다. “예전의 티켓 정책은 회원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여러 개의 공연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나는 관객 층을 확장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양한 계층과 인종이 프랑스에 살고 있고, 그중엔 공연을 접하기 어려운 이도 많기 때문이다. 비회원들도 쉽게 표를 구할 수 있게 한 덕분에 관객 수도 늘고 연령대도 젊어졌다. 이제 30대 이하 관객이 60%나 된다.”

-활동 반경을 전 세계로 넓히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찾아오는데 굳이 밖으로 나가는 이유는.
“다른 문화와 교류할 수 있는 장을 서로 오가며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해외투어를 가면 각 나라 관객의 반응이 다 다르다. 각기 다른 부분에서 감동을 받더라. 그런 경험이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우리에게 투어는 새로운 관계 발견의 학습장이다.”

-일본의 부토(舞踏)단체 ‘산카이주쿠’가 30년 동안 극장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우리 극장에서 30년간 활동한 ‘산카이주쿠’를 계속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관객 층을 넓히는 데 크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연간 3, 4회 공연을 해오던 이들에게 올해는 10회를 하게 했다. 서양 예술가들은 예부터 아시아 전통 예술에 매혹되어 왔다. 나도 어릴 적부터 가부키 같은 일본 공연을 많이 봐왔다. 파리가 아시아 예술에 대해 호기심이 많은 이유는 다양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내한 작품 ‘빅토르’는 20세기 프랑스 작가 로제 비트라크의 작품으로 초현실주의 연극과 잔혹극의 효시로 꼽힌다. 아홉 살 소년의 연극놀이를 통해 1920년대 부르주아 사회를 비판하는 드라마가 물신숭배·허위의식·가족해체·교육문제 등 지금의 한국 현실과 절묘히 오버랩되는 지점이 흥미롭다.

‘잔혹극’이라고 피가 튀는 것은 아니다. 에마뉴엘의 ‘빅토르’는 아름다운 미장센과 노래하는 듯한 대사 속에 숨막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내 차원이 다른 잔혹성을 창조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파리 초연 시 극찬받은 시적인 조명과 무대를 모두 공수해 온다는 점도 기대를 더한다. 대형 컨테이너 3대 분량의 세트로 거대한 나무와 샹들리에, 성 모양의 집 등 비극적이면서 아름다운 장중한 무대가 펼쳐질 예정이다.

-첫 아시아 투어에 ‘빅토르’를 선택한 이유는.
“비트라크를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초현실주의의 아버지인 그는 20세기 모든 작품의 극작법에 영향을 줬다. 연출가는 국경을 넘어 작가와 작품을 전달하는 역할을 해줘야 한다. 서양연극사에서 상상의 아이를 무대에 올린 것은 ‘빅토르’가 처음이었다. 그는 상상의 아이가 어른들의 세상을 고발하게 했고, 그렇게 새로운 연극을 탄생시켰다. 그의 작품이 중요한 것은 연극이 현실을 초월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시인의 시각 같은 거다.”

-잔혹극이라 해서 심각할 줄 알았는데 영상을 보니 객석에 웃음이 자주 터지더라.
“1920년대의 극장은 사회를 도발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래서 잔혹함이 필요했다. 잔혹함은 쾌락의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코 진지함이 아니다. 공연은 재미있고 웃겨야 한다.”

-엘로디 부셰가 출연한다. 한국에선 영화 스타의 연극 출연이 드문데.
“프랑스 영화배우들은 연극을 통해 관객과 만나고 싶어한다. 살아있는 만남을 통해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나는 기존 이미지와 다른 역할을 제안한다. 다양한 시도를 하게 만드는 거다. 엘로디는 늘 젊고 섹시한 역을 맡았었기에 이번엔 남자의 욕망의 도구가 아닌 엄마 역할을 제안했다. 남편에게 배신당한 엄마 역할이 그녀에게 어려울 수 있지만, 엘로디는 새 도전에서 굉장히 발전된 모습을 보여줬다.”

2011년 이자람이 별관 극장서 ‘사천가’ 공연
작가이자 연출가인 아버지와 여배우인 어머니를 둔 에마뉴엘은 어려서부터 세계 거장들의 무대를 자연스레 접했다. 17세에 이미 극단을 만들고 21세에 오베르빌리에 국립중앙극장에서 프로 데뷔를 했다. 98년 연극평론협회상을 수상하며 프랑스 연극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부모님 덕에 공연 관람도 많이 했지만, 책을 좋아해 어려서부터 희곡을 많이 읽고 연극놀이를 즐겼다. 또 공동 작업을 좋아해 고등학교 때 극단을 만들었다. 그런 어려서의 경험들이 새로운 연극 형태를 창조해 가는 데 도움이 됐다.”

-프랑스인들은 일반적으로 공연문화와 친숙한가.
“우리는 17세기부터 몰리에르, 코르네이유, 라신 등 굉장한 연극 역사를 갖고 있기에 극장 방문이 자연스럽다. 특히 20세기 파리는 세계의 교차로였다. 많은 외국 예술가들이 파리에 정착한 덕분에 극장이 세계적인 미학의 집합체가 됐고, 관객 층을 더욱 넓혀 극장을 풍요롭게 했다. 50년에 이미 연극이 대중예술이라는 관념이 확립됐다. 아비뇽 페스티벌 창시자 장 빌라르는 모든 시민이 공연을 보기를 원했고, 이는 국가적 교육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나도 학교에서 예술문화 연구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교사와 아티스트들이 학교에서 예술을 잘 교육하고 전달할 방법을 고심한다. 부모가 극장에 데려가지 않는다면 학교에서 데려가야 한다. 예술이 인간을 발전시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2011년부터는 파리가을축제의 예술감독까지 겸하고 있다. 파리가을축제는 매년 9월 중순부터 12월까지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실험작과 세계 곳곳의 전통 공연을 접할 수 있는 유럽의 가장 중요한 축제 중 하나로, 테아트르 드 라 빌과 긴밀한 유대 속에 진행된다. 2002년 한국이 주빈국으로 초청돼 각종 국악공연이 소개된 이후 프랑스에서 판소리 붐이 일었다. 2011년에는 에마뉴엘의 초청으로 이자람의 ‘사천가’가 테아트르 드 라 빌의 별관 아베스극장에 올라 주목받기도 했다. “판소리가 너무 오래 파리에 오지 않아 초청했다. 판소리는 남성적인 유파와 여성적인 유파가 있다는데, 우리는 아시아 예술에서의 남녀 관계에 관심이 많아 판소리가 더욱 궁금했다. 18세기에 생성된 이 전통을 우리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굉장히 크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번 기회에 아직 세계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한국 공연을 많이 접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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