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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연극|휘파람과 욕설과 갈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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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연극과 관객과의 관계에는 주목할 점이 많다. 무대에 동화해서 연극속에 몰입하는 경우와는 달리 조직적인 반발이 생겨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지금은 독립국가가 되어 있는「에이레」에 20세기초에 문예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자주독립을 원하는 애란민족의 민족주의와 밀접하게 관계지어져 있었다.
그 문예부흥운동 가운데서「W·B·예이츠」와「그레고리」부인이 영도하던 연극운동이 활발했었는데 그때 두각을 나타낸 귀재가「존·밀링턴·싱」이었다. 그의 작품『서쪽나라의 멋장이』가「더블린」의 유명한「아베이」극장에서 상영된 것이 1907년의 일이다.
이 작품은「에이레」의 무식한 시골 사람들을 그리그 국민성의 일면을「코믹·터치」로 풍자해본 매우 익살맞은 극인데 작품이 잘 되었을 수록에 일부의 불만, 말하자면 연극외적인 비난이 더해진 것이다.
그때 상영중의 소란을「그레고리」부인이 뒤에 회상해 놓은 것이 있는데 초반부터 극장안에는 심상치 않은 공기가 돌고 2막이 진행될 때부터 일부의 관객이 떠들기 시작했으며 3막에 들어가자 비난이 노골화 되었다고 한다. 다음날은 약 50명가량의 수상한 집단이 객석 한 모퉁이에 자리잡고 앉아 극장측에서도「조직된 소란」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경찰에 다 연락했다. 그리고는 막을 올리는데 그 친구들이 떠들어 대는 바람에 대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도리없이 막을 내렸는데「그레고리」부인은 우겨서 끝까지 버티어 나갈 것을 주장했다.
물론 방해는 그대로 계속되었다. 경찰이 단속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은 소란을 피워서 방해만 놓았지, 배우들에게 직접적인 위협은 가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태속에서 1주일을 계속했고 방해꾼들도 1주일을 내내 표를 사가지고 극장에 들어왔다. 이「에피소드가 말해주는바 양자사이의 관계에는 단순한 이야깃거리 이상의 무엇이 있다. 부인을 중심으로 한 극단측은 그런 사태를「군중의 검열에 대항하는 자유의 싸움」으로 규정하여 끝까지 버티어 나간 것인데 그 태도나 신념은 연극운동을 의식적으로 하는 사람들 아니고는 좀체로 볼수 없는 것이지만, 한편 1주일 동안이나 끈덕지게도 방해행동을, 적어도 공연의 테두리안에서 계속한 일부 관객의 끈기는 보통은 아니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싸움은 1830년에「프랑스」에서 문호「위고」의 작품『에르나니』가 초연되던 날밤의 것도 매우 유명한데 그 싸움의 의미는 극장에서 낭만파가 재래의 고전주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현실적이자 동시에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비슷한 경우는 1889년 백림에서「하우프트만」의『해뜨기 전』의 상연때도 볼 수 있었는데 (그때는 바로 무대위에서의 자연주의의 승리) 관중들 자신이 신구양파로 갈라져 욕설·휘파람·갈채등이 뒤섞이고, 급기야는 서로 멱살을 잡는 사태에까지 번지기도 했던 것이다. 관중의 정서적 반응이 즉각적이고 또한 집단적인 극장안에서 만 볼수 있는 현상이다.
어두운 영화관 안이나 TV수면이 기계의「메커니즘」만을 강조해 주는 안방극장에서는 전혀 기대될 수 없는 이런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연극을 보러간다.
지금은 물론 그러한 집단적정서의 경험을 위한 장소가 극장만은 아니다. 거대한 운동경기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정치집회에서는 선동이 의식적이고「데모」대의 시위마저도 그런 부차적 작용을 끼친다.
그러나 그 원초적이자 가장 전형적 형태는 지금부터 2천5백년전「아테네」의「디오니소스」신전에 부설된 거대한 야외극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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