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가장 길었던 3일(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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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대 국회가 개최된지 불과 닷새만에 6·25전난을 맞이한 국회의원들의 위증을 계속 들어보자.
▲황성수씨(당시 용산갑·무·현 한국법학원원장·54) 『26일 낮에는 채병덕 참모총장이 적을 의정부 밖으로 격퇴했다는 말을 듣고 안심, 그 날밤에는 중앙청에서 비상국회를 열고, 해공(신익희 의장)의 제의로 수도사수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어요. 그러나 해공이 이 결의안을 전하려 경무대에 갔다가 행정부가 이미 수원으로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27일 새벽에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국회로 갈 때에는 용산역에서 풀로 위장한 지프를 내주더니, 올 때에는 타고 갈 차조차도 안 주어서 용산집까지 걸어가는 북새통이었지요.

<채장군 빨리 피난권고>
27일 아침 급할수록 침착해야한다는 좌우명대로 평시처럼 조반을 마친 다음에 바로 맞은편에 살던 채병덕 참모총장집에 가서 전황을 직접 물어봤지요. 채소장은 대뜸 빨리 떠날수록 좋다면서 어제 국회에서 한 보고는 군기라서 할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고 사과하지 않겠어요? 평생, 이런 거짓말은 처음 했다면서 몹시 괴로운 표정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정신이 펄쩍 들더군요. 나는 채장군한테서 휘발유 한통을 얻어 6인승 세단에 운전사 가족까지 모두 13명을 태워 가지고 피난길에 올랐읍니다.』
▲정일형씨(당시 중구을·무·현 신민당출마의원·67) 『27일 새벽 국회가 급히 소집되어 중앙청 회의실에 갔지요.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나와있었는데 그들은 증언에서 3∼5일 이내에 평양까지 점령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와 강력한 군대를 갖추고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 전에도 만일 북괴의 도발이 있을 때에는 순식간에 격퇴하여 해주에서 아침을 먹고 평양에서 점심을 먹고 2, 3일 내에 백두산에 태극기를 휘날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거든….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불안한 생각이 들어 처남 이태윤(납북)과 함께 가족회의를 열었어요. 가족들은 처음에 몹시 불안해했지만 신국방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니까 좀 안심하는 눈치였어요.

<결의문 가지고 미대사관으로>
국회의 수도사수결의는 만장일치로 채택됐어요. 결의문 내용은 국회의원은 1백만 애국시민과 같이 수도를 사수한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이 결의문 작성에 참여했습니다. 그 결의문을 가지고 행정부 인사를 찾아봤더니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반도호텔에 있는 미대사관으로 갔지요.
무초 대사는 없고 다른 직원들이 서류를 불태우고 있지 않아요. 이거 사태가 급하다고 느꼈어요. 국회로 다시 돌아갔지만 아무도 없었고 중앙청사를 같이 쓰고있는 장관들도 보이지 않더군요. 그게 27일 아침이지요….』
▲이충환씨(당시 충북진천·무·현 신민당정책위원·53) 『27일 새벽 1시쯤에 집에서 자고있는데 국회가 급히 소집됐다고 경찰관이 지프로 데리러 왔어요. 야간 국회는 수도서울의 사수를 결의했지요. 지금 생각으로는 원세훈 의원(서울중구갑·민주연맹)이 주동적 발언을 한 것 같아요. 비상국회는 한시간 정도 계속된 것 같습니다. 수도사수의 문안작성은 신익희 의장에게 일임하여 의장실에서 신의장·사무총장·나 이렇게 문안을 작성해 가지고 경무대로 갔는데 이 박사는 벌써 피난 갔지 않아요. 그래 할 수없이 이낙형 부통령(고인)을 찾아가 단잠 자는 것을 깨워 그간의 경과를 말하고 결의문을 전달했지요. 다시 국회에 돌아오니까 새벽 4시쯤이었어요. 대통령이 피난 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회의원들도 모두 뿔뿔이 헤어졌어요.

<고의적삼입고 피난길에>
나는 한복 고의적삼으로 갈아입고 국회의원증과 철도승차증 그리고 약간의 돈을 가지고 서울을 떠났습니다.』
▲태완선씨(당시 강원영월출신·무·현 재야정객·56) 『25일 아침녘에 내 선거구서 제헌의원인 체신장관 장기영씨댁으로 인사를 가 한담을 즐기고있는데 경무대에서 장장관한테 전화가 왔어요. 38선에서 충돌이 일어났으니 급히 경무대로 오라는 내용이었지요. 지프를 타고 신당동집으로 돌아오는 네거리의 공기가 좀 이상한 것 같았어요. 라디오·뉴스로 북괴의 공격을 알았고, 그날 그럭저럭 하루를 지냈습니다. 27일 아침에 나는 그때 영월탄광(종업원 4천명)소장을 겸하고 있어 안국동 네거리에 있는 서울출장소로 가보았는데 윤성순(당시 경기포천·무) 최헌길(당시 강원강릉읍·국민당) 두 의원이 와있었어요. 정세에 관한 얘기를 주고받다가 중앙청 안에 있는 국회로 갔지요. 김용무(전남무안·민주국) 조소앙(성북·사회) 의원 등 원로의원 5, 6명이 앉아서 새벽에 국회를 소집해서 수도를 사수키로 결의해 놓고 도망을 가다니…하며 욕을 하고는 우리는 끝까지 사수해야한다고 말하더군요.
그분들 중 세 명은 국회소집의 연락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고, 나 역시 비상회의에는 참석치 못했습니다.

<집에도 못 들리고 피난길>
안국동 출장소로 다시 돌아와 라디오를 트니까 미아리방면에서 적을 격퇴했으므로 시민은 안심하라는 낙관적인 보도였어요. 27일 낮12시쯤 되어 북괴 비행기가 기총소사를 하고 지나갔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하오 l시반쯤 또 중앙청 3층에 있는 국회사무처로 가보았어요. 정운근 사무차장(주=사무총장은 이종선씨) 등 몇 사람이 앉아 있기에 어찌된 형편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조봉암 부의장이 국방부로 갔으니 무슨 회답이 있을 것이라는 대답이었어요. 막 복도로 나오는데 조부의장이 숨을 몰아쉬고 올라오면서 빨리 도망가지 않고 무엇하느냐. 하오 2시에 한강교를 폭파한다고 하니 빨리 피난가라고 해요. 밖에는 바리케이드가 쳐있고 적기가 빙빙 도는 것이 보여서 벽에 붙어 출장소로 돌아왔지요. 나는 즉시 윤성순·최헌길 의원과 경호순경1명만 지프에 태워 한강교 쪽으로 달렸습니다.
그런데 용산에 이르렀을 때, 윤성순 의원이 2, 3분만 집에 다녀가 얘기하고 오겠다고 하지 않아요. 나도 가족을 내버려두고 가는 사람인데 당신도 집에 가면 다시는 못 나온다. 차를 세울 수 없다고 잘라 말했지요. 심중이야 오죽하겠소마는!』
26일 한밤중에 열린 비상국회에는 2백10명 의원 중 참석하지 못한 의원이 많았다. 증인들의 기억을 종합해보면 다수 경우는 연락을 받지 못해 못 나와 겨우 과반수의 의원이 됐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태는 이미 26일 하오부터 급속히 절망상태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알림=이 연재 계획기사에 대해 참고 될만한 의견이나 제언이 있으면 중앙일보사편집국 민족의 증언담당자 앞으로 연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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